朴義烈
朴義1889. 1. 21 ~ 1930. 11. 1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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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89년 1월 21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오촌리(梧村里)에서 아버지 박주병(朴周秉)과 어머니 무안 박씨의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호는 하산(河山)이다. 이명으로 박세진(朴世鎭) 혹은 박하산(朴河山)을 사용하였다. 형은 의연(義然)이고, 아우는 의훈(義熏)이며, 매부는 권찬기(權燦基)이다. 양부모인 당숙 박주근(朴周根)과 평해 황씨에게 입양되었다. 일찍이 한학을 배우고 유학에 심취하였으며, 성격이 호방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1909년 형 의연과 함께 신돌석(申乭石) 의병부대에 참여하였다. 일찍이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였던 형 박의연과 함께 안동의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등을 따라 1912년 서간도(西間島) 퉁화(通化)으로 건너갔다. 1912년 퉁화현 하니허(哈泥河)에서 허혁(許爀) 등이 조직한 부민단(扶民團)에 참여하여 1913년 중앙검찰장(中央檢察長)을 역임하였다. 1914년 퉁화현 하서구(下西溝)에서 남흥학교(南興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1917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1919년 한족회(韓族會) 퉁화지방 천가장(千家長)을 역임하는 등 한국 교민의 생활 안정과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참여하였다. 1922년 8월 통합 독립군 세력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제1회 중앙 의회에서 통화총관소(通化總管所) 통화검찰감(通化檢察監)에 임명되었다. 이후 1923년 대한통의부 통화총감(通化總監) 이기완(李基宛)의 지휘로 소대장(小隊長) 및 참사(參事)를 맡아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어서 같은 해 정의부(正義府) 제4중대장 이규성(李奎星)과 총관(總管)을 맡고 있던 형 박의연 등과 함께 지린성 화뎬(樺甸)현으로 이주하였다. 1924년 11월 4일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창립총회에 참여하여 지당조직위원(支黨組織委員)으로 선임되었다. 한족노동당은 중앙의사위원회(中央議事委員會) 위원장 김응섭(金應燮)이 주도하였으며, 형 박의연은 중앙의사위원에 선임되었다. 1924년 지린성 아청(阿城)현 주위안창(聚源昶)에서 자치회(自治會)를 조직하고 박성호(朴聖浩)·유기동(柳基東)·김만수(金萬秀)·정병식(鄭秉植) 등과 함께 한인 동포를 탄압하던 일본 총영사와 형사부장 등을 제거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중,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포위 공격을 받았다. 항전 끝에 일본 총영사 및 일본 경찰 10여 명을 사살하였으나 현장에서 유기동·김만수 등은 사망하였고 겨우 살아남았다. 1924년 11월 성립된 정의부의 부교(副校)와 지방 조직책(地方組織責)으로 활동하였고 1925년 지린성 아청현 주위안창에서 동원학교(東源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한편, 1928년부터 북만주 빈장(濱江)현 8구(八區)에서 성강정미소(濱江精米所)와 주허(珠河)현 하동(河東) 오길밀하(烏吉密河)에서 농장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30년 11월 17일 주허현 오길밀하에서 공산주의자 조명(趙明)에 의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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