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효
朴源孝1905. 4. 19 ~ 1942. 7.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 ·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 · 경남적색노동조합
- · 조선공산주의협의회 경남협의회 서부적색노조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3)
관련 사건
- ·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 ·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 · 경남적색노동조합
- · 조선공산주의협의회 경남협의회 서부적색노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3) 1905년 4월 19일 경상남도 진주군(晋州郡) 내동면(奈洞面) 삼계리(三溪里)에서 태어났다.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와 일본의 도쿄영어보급학교(東京英語普及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일본에 있을 당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일본총국(日本總局)에서 활동하다가, 일제 당국의 탄압을 피해 진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조선일보 진주지국을 경영하였다. 1931년 3월 진주에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朝鮮共産主義者協議會) 경남 대표로 활동하던 권대형(權大衡)과 함께 ‘무명의 결사’를 조직하였다. 당시 권대형·강두석(姜斗錫)·박수명(朴洙命) 등과 “과거 사회운동의 오류를 반성하고 향후 노동자와 농민에 기초하여 혁명적인 대중운동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에 농민, 노동, 학생으로 3개의 활동부문을 정하고 서로 협력해 활동하기로 했는데, 이때 노동부(勞動部) 책임을 담당하였다. 1931년 5월 8일 ‘진주고등보통학교(晋州高等普通學校) 학생 사건’에 연루되었다 하여 한때 진주경찰서에 붙잡혀 구금되었으나, 5월 14일 무사히 풀려났다. 같은 해 7월 1일 진주시내 형평사(衡平社) 회관에서 각 사회단체의 결의로 진주소비조합(晋州消費組合)을 발기하는 데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같은 해 9월 5일 진주로 출동한 서울 종로경찰서 형사대에 붙잡혀서 한동안 진주경찰서에 구금되고 가택수색을 당하였으나, 9월 8일 무사히 풀려났다. 그런데 위 ‘무명의 결사’를 조직한 후에도 생각대로 활동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않자, 권대형의 소개로 새로이 강병도(姜炳度)를 가입시켜 조직을 개편하기로 하였다. 1931년 9월경 회합에서 혁명적 대중조직인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적색노동조합(赤色勞動組合)·반제동맹(反帝同盟)·적색구원회(赤色救援會) 등의 형태로 재조직할 것을 협의하였다. 같은 해 12월 강두석 집에서 회합하여 적색농민조합 조직부, 적색노동조합 조직부, 반제동맹과 적색구원회 조직부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때 반제동맹과 적색구원회 조직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1932년 2월 23일 진주로 출동한 서울 종로경찰서 형사대에 붙잡혀 2월 26일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오랫동안 조사를 받은 후 같은 해 7월 경남도경찰부로 넘겨져 7월 15일 진주경찰서로 인계되었다. 1932년 8월 부산지방법원 진주검사분국(晋州檢事分局)으로 송치되어 12월 26일 예심이 종결되었다. 1933년 3월 7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항소를 제기했으나, 같은 해 4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당시 일제 당국과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이라 하여 서울과 함경도, 경상도 등으로 연결된 전국적인 조직 사건으로 취급하였다. 진주 사건의 경우 마산(馬山)·하동(河東) 등지의 사건과 함께 ‘조선공산주의협의회 경남협의회 서부적색노조(西部赤色勞組) 사건(일명 경남적색노조 사건)’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풀려난 후 1935년 6월부터 1936년 3월까지 동아일보 진주지국 기자로 근무하였다. 1942년 7월 20일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후손에 따르면,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그보다 1년 전인 1941년 6월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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