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한긍

金漢肯

1881. 9. 5 ~ 1951. 9. 17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한긍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서울의열투쟁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서울특별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동우회(同友會)

포상 정보

  • · 애족장(2015)

관련 사건

  • · 광무황제 강제 퇴위
  • ·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5) 1881년 9월 5일 한성부(漢城府) 서서(西署) 필운대(弼雲臺, 현 서울특별시 필운동)에서 태어났다. 집안 내력과 성장 과정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1907년 재판을 받았을 당시 직업이 중매상이었던 것으로 미루어보면, 일찍부터 상업 관련 업종에 종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광무황제 강제 퇴위 이후 진행된 정미7조약(한일신협약) 체결에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정확한 가입 시점은 알 수 없지만, 동우회(同友會)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 단체는 1907년 (음)3월에 조직된 단체로 ‘황실 존중’, ‘청년교육’, ‘동양 평화’, ‘독립유지’를 목표로 삼았다. 헤이그에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광무황제(고종)를 폐위할 것을 기획하였다. 1907년 7월 6일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 주제로 비상내각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송병준(宋秉畯)은 고종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일왕(日王)에게 사죄하고 황태자의 교육을 부탁하며, 대한문(大漢門)에 나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를 맞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소식은 동우회에도 알려졌다. 이후 회의가 소집되었고 고종의 강제 퇴위를 반대하는 시위로 연결되었다. 동우회의 움직임에 직접 참여했다는 구체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동우회 회원으로 재판을 받고 형을 받은 것으로 보아 1907년 7월 이후 동우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궁궐 내에서 광무황제의 소식과 일본 외부대신 하야시 다다스(林董)가 한국으로 온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1907년 7월 17일 동우회 부회장 윤이병(尹履炳)의 주관으로 특별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자리에서 광무황제가 일본으로 가는 것은 정부 각 대신의 핍박에 의한 것이고, 이것을 좌시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회원들의 의견이 어떠한지를 묻고 싶다고 하였다. 이때 많은 회원이 대신들을 국적(國賊)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결정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였고, 회의 이후 인근 상인들과 함께 시위에 나섰다. 1908년 7월 18일, 내각에서 고종에게 을사늑약에 날인하고, 황태자에게 양위하며, 일본에 가서 일왕에게 사죄하라고 요구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분개하였으며, 이윤용(李允用)을 대신하여 윤이병을 회장으로 추대하는데 앞장선 것으로 보인다. 이때 대궐 문 앞에 가서 고종의 출입을 살피고 남대문 정거장에 가서 기차에 깔려 죽더라도 고종의 일본행을 막아야 한다는 윤이병의 연설에 동조하였다. 동우회 회원과 시민들과 함께 대한문 앞으로 이동하여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7월 19일, 광무황제가 융희에게 양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일진회(一進會) 기관지 역할을 했던 국민신문사와 일본인 가옥이 파괴되었다. 7월 20일 동우회 간부와 회원, 시위대가 석고단(石鼓壇)에 모였을 때 동우회 회원 자격으로 참석하였다. 이때 고종의 퇴위와 일본으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현 정부 대신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였고, 이완용 집에 불을 놓는 것에 앞장섰다. 당시 경찰에 붙잡힌 것으로 『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시위를 주도한 동우회에 대해 일본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다. 1907년 7월 21일 윤이병에게 노상 집회를 금지한다고 경고하였으며, 7월 25일에는 동우회의 장부를 조사하였다. 3일 뒤에는 경시청(警視廳) 경찰 20여 명이 동우회 사무실을 갑자기 습격하였고, 수십 명을 붙잡았다. 이때 동우회 회원으로 시위를 주도한 사람으로 지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에 붙잡힌 이후 평리원(平理院)으로 이감되었다. 이때 윤이병·이근우(李根雨)·심원택(沈源澤)·홍재칠(洪在七)·홍재설(洪在卨)·차춘성(車春聖)·이광수(李光洙)·이존복(李存馥)·강만선(姜晩善)·최병선(最炳善)·김경석(金擎錫)·조순종(趙順鍾)·이인승(李仁承)·강준영(姜俊永)·최원석(崔元錫)·김재붕(金在鵬)·이필상(李弼相)·임병응(林炳應)·여규면(呂圭冕)과 함께 재판을 받게 되었다. 1907년 (음)12월 29일 평리원(平理院)에서 윤이병을 제외한 종범(從犯)으로 간주되어 『형법대전(刑法大典)』 제135조와 제195조에 근거하여 유형(流刑) 10년을 구형하였다. 유배지는 전남 지도(智島)와 진도(珍島)였는데, 이근우·김경석·조순종·강준영·최원석·김재붕·이필상·여규면 등과 함께 진도로 결정되었다. 이후 인천에서 군산환(群山丸)을 타고 유배지로 떠났다. 동우회 활동 이후 행적은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남기현⋮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