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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龍德

朴德

1913. 7. 27 ~ 2011.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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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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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고성(高城)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강원도 고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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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13년 7월 27일 강원도 고성군 고성면(高城面) 고성리(高城里)에서 태어났다. 1931년 3월 고성면 소재 고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약 3년간 한문을 연수하였다. 1938년 4월 서울의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학자금 부족으로 1939년 3월 중퇴하였다. 같은 해 9월 12일 고성군 농회(農會)의 임시 고원으로 채용되었다. 학교 중퇴 직전까지 같은 고향 출신이자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 중퇴생인 김종희(金宗熙)로부터 지도를 받아 민족주의 관련 문헌을 탐독하고 그 취지에 공명하여 독립을 위해 노력하기로 결의하였다. 1938년 3월경 고성의 집에서 김종희와 함께 모여, “조선인은 조선이 일본 식민지 아래에 있으면서 조선 독립정신을 망각하고 있으므로 우리들이 조선어 문학을 선전하여 조선민족주의를 앙양케 하여 조선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자”는 뜻에 합의하였다. 같은 해 9월 상순경에 다시 김종희와 회합하고,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그 앙양을 도모하기 위하여 민족문학잡지사(民族文學雜誌社)를 경영함으로써 그 주의와 선전을 고취하고자 노력하기로 협의하였다. 그 해 12월 하순경 같은 장소에 다시 모여 김종희가 창작한 「1년 또 그의 기록」을 일반에 잡지로 발표하여 민족주의 선전 앙양에 임하자고 하면서 비평 검토하였다. 1939년 6월 중순경 다시 모여 김종희의 창작 소설인 「추억」을 잡지에 게재하고 비판, 검토하였다. 7월 하순경 고성면 구암산 산상에서 회합하고 이미 협의한 바 있는 민족문학잡지사 경영과 관련하여 김종희가 경영을 맡고, 이때 자금도달을 담당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결과 8월 21일 서울 사직동 장복희(張福姬)가 운영하는 여관 객실에 다시 모여 잡지사 명칭을 ‘조선문예부흥사(朝鮮文藝)復(興社)’로 정하였다. 이때 동사(同社)의 활동 방침을 “① 조선 전통 앙양, ② 조선어 미(美)의 발휘, ③ 조선 문사(文士)의 생활 보증, ④ 세대와 문예의 적극적 교섭 촉진” 등 4개 항목으로 결정하였다. 1939년 7월 하순경 고성면 고성리 이장원(李長元)의 집 상점에서 “일본 제국이 조선에 대하여 정치적 압박이 강대하므로 조선 독립 목적을 위하여 조선 민족의식을 앙양함에 관하여 잡지사를 경영하여 이윤이 많게 하고 또 조선독립에 기여하는 등 일석이조의 양책으로 함께 경영 노력하자”는 취지로 이장원을 설득하여, 결국 9월 9일 이장원으로부터 상점매각 자금 3만 원을 제공하겠다는 승낙을 받아냈다. 같은 해 9월 10일 고성군 외금강면 삼일포 산속에서 고성면의 김동가(金東嘉)에게도 잡지사 경영에 필요한 자금의 제공을 설득하여 김동가의 숙부인 강원 통천군(通川郡) 고저면(庫底面) 오유리(五柳里)의 김광제(金廣濟)로부터 승낙을 받아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40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을 받았다. 이후 문학잡지 『문장(文章)』이 1941년 9월 폐간될 때까지 운영자금을 제공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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