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식
朴永植1918. 3. 27 ~ 1993. 4. 2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결심대(決心隊)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결심대(決心隊)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18년 3월 27일 경상북도 경산군(慶山郡) 남산면(南山面) 사월리(沙月里)에서 아버지 박경석(朴慶碩)과 어머니 이정분(李正分)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남 밀양(密陽)이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1944년 6월 남산면 사월리 출신 박재달(朴在達) 등과 함께 징병·징용을 위해 청년대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청년들을 규합하여 일제에 항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이들과 그 해 7월 모두 3차례에 걸쳐 회합을 가졌다. 7월 8일 열린 2차 회합에서 사월리 청년들을 비롯하여 산양리(山陽里)의 김임방(金任方), 송내리(松內里)의 김위도(金渭道), 남곡리(南谷里)의 최외문(崔外文) 등과 동지 규합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7월 15일 사월리 원당보에서 열린 3차 회합에서 29명의 대원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그 해 7월 26일 새벽 남산면 사월·산양·송내·남곡리에서 모인 26명의 청년들과 함께 대왕산에 올라갔다. 박재달 등 정보연락대 3인을 남겨두고 대왕산에 오른 26명의 청년들은 결심대(決心隊)를 조직하였다. 결심대 2소대 소대장 배상연(裵相淵) 휘하에서 투쟁하였다. 7월 27일부터 시작된 남산면주재소 투쟁에서 일제 경찰들의 회유를 물리치고, 8월 1일부터 2차례에 걸친 일제 경찰의 공격에 죽창을 들고 돌을 던지며 저항하였다. 그리고 용산(龍山)으로 이동한 뒤 8월 5일부터 일제 경찰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자 같은 방법으로 대응하였다. 결심대는 남산면주재소 공격과 주재소 주임 처단, 식량 공급과 진지 이동 등 새로운 계획을 세우며 항쟁 의지를 다져 나갔다. 그러나 8월 9일 식량공급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한 대원들과 함께 하산하여 은신하였다. 8월 13일까지 대원 전원이 붙잡혔다. 남산면사무소에서 이틀 동안 조사를 받고 경산경찰서로 이송되어 이른바 소위 보안법 위반 및 폭력행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44년 10월 14일 대구형무소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받는 등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4월 박재달 등과 함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1945년 광복으로 8월 17일 소송이 취하되었다. 1995년 5월 31일 남산면 사월리에 대왕산죽창의거공적비(大王山竹槍義擧功績碑)가 건립되었고, 2015년 5월 29일부터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권대웅⋮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