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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석

明道奭

1885. 4. 3 ~ 1954. 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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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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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마산(馬山)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마산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일합사(일명 일심사)
  • · 마산구락부
  • · 신간회 마산지회
  • · 마산야학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85년 4월 3일 경상남도 마산(馬山) 중성리(中城里, 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성동)에서 명응찬(明應贊)과 이묘악(李妙岳)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시장(魚市場) 객주(客主)의 집안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호는 허당(虛堂)이다. 마산지역에서 다양한 국내항일 활동에 참여하였다. 1902년 일제의 마산포 상권 침탈에 맞서서 상권 수호투쟁을 벌였다. 1907년 옥기환(玉麒煥), 구성전(具聖傳) 등과 함께 한국 최초로 마산노동야학교(勞\動夜學校)를 설립하였다.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높이는 데 노력하는 한편, 여성교육에도 힘썼다. 일제강점기에 마산에서 양조업, 운수업을 경영하며 사업가로서 마산지역의 발전을 위해 활약하였다. 마산창고주식회사 이사, 원동(元東)무역주식회사 이사, 조선운수계산(朝鮮運輸計算)주식회사 이사, 마산합동운수주식회사 대표, 조선운수주식회사 이사 및 마산지점장, 경남해운주식회사 감사, 마산협동합자회사 중역 등을 지냈다. 이와 동시에 마산지역을 중심으로 교육 사업을 벌였고, 사회운동가이자 민족운동가로도 활동하였다. 마산 창신학교(昌信學校) 교사로 근무 중이던 1916년 12월 구영필(具榮佖)의 권유로 밀양(密陽)의 김대지(金大池)·황상규(黃尙奎), 평양(平壤)의 장인환(張仁煥), 마산의 안확(安廓) 등과 함께 비밀결사 일합사(一合社)를 조직하였다. 일합사는 ‘독립을 위해 일편단심(一片丹心)을 합한다’는 뜻으로서, 일심사(一心社) 또는 사회회사(社會會社)라는 명칭도 사용하였다. 일합사는 실업·군사·외교 등 광범위한 부문의 준비와 실력행사로 국권회복을 구상하였고, 국외의 독립운동가들과도 연계할 계획이었다. 1917년 12월경 중국 펑텐(奉天)에서 구영필이 평안남도경찰부에 검거되면서, 1918년 초 무렵 평양경찰서에 체포되어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수개월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마산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12일 최용규(崔龍奎)·이형재(李瀅宰)·이정찬(李廷讚)·최동락(崔東洛)·신택식(辛澤植) 등과 사전에 협의하여, 같은 달 21일 마산 장날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하였다. 이를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만세시위 당일에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9월 당시 곡물상 원동상회(元東商會) 사장 옥기환, 김철두(金轍斗)와 함께 자본금 50만 원으로 원동무역(元東貿易)을 발기하였다. 같은 해 11월 15일 창립총회를 개최하였으며, 1920년 5월 24일 주식회사로 설립 등기하였다. 원동무역은 일제강점기 한국인이 마산에 설립한 최초의 주식회사인데, 이를 매개로 독립운동 자금 조달 등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3년 5월 19일 정기 주주총회에서 이사로 피선되었다.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 당시 주주로 참여하였고, 마산지역의 언론 창달을 위해 노력하였다. 같은 해 7월 20일 마산노동야학의 교사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며 항일교육에 힘썼다. 1920년 6월 마산의 어시장 객주 등 상업자본가들을 중심으로 마산구락부를 조직하고, 이후 교풍부장(矯風部長) 및 총무로 활동하였다. 마산구락부는 당시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구심이 되었으나, 민족자본가와 친일자본가가 섞여 있고 세대 간의 사상적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920년 가을 중국 펑텐성 안둥(安東)에서 미국에 망명해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가 박용만(朴容萬)의 밀사와 만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평양으로 이송되어 6개월 동안 조사를 받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마산으로 돌아온 뒤에도 계속 노동야학의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21년 4월 당시 마산청년단주동맹(靑年斷酒同盟)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5월 2일 조선총독부의 제2회 조선교육조사위원회 개최를 계기로 전국의 유지들이 「조선교육 개선 건의안」을 제출할 때 참여하였다. 같은 해 6월 기존 계(契) 조직을 마산어시장조합으로 개편하고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같은 해 7월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3년 3월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마산의 물산장려회(物産獎勵會)에서도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4월 마산부 학교평의원(學校評議員) 선거에서 평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마산 시민대회의 실행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5년 11월 마산의 공회당건축기성회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7월 마산부민대회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2월 10일 마산에서 한국인 복리증진을 위한 중견기관 발기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어 3월 20일 마산동인회(同人會)를 창립하였다. 그 즈음 마산 배달유치원(培達幼稚園)을 설립하고 이사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6월 마산동인회에서 마산의 철도 부지 문제와 관련하여 중간소작자로 학교조합에 대여하는 것을 폐지하고 직접 소작인에게 대여하도록 당국에 교섭하는 교섭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몇 년간 계속 이 문제와 관련해 부민대회 개최, 이타가키(板垣) 부윤(府尹) 규탄 연설회 개최, 총독부에 진정서 제출 등을 주도하며 마산 시민의 편에 서서 활동하였다. 1927년 전국적으로 신간회(新幹會)가 설립될 때 마산지회 설립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7월 20일 신간회 마산지회를 창립하고, 설립대회에서 총무부 간사 및 정치문화부 담당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0월 27일 제3회 간사회에서 여해(呂海)의 뒤를 이어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5월 6일에는 신간회 마산지회 부회장, 1929년 1월 28일에는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0월 3일에는 신간회 경상남도지회 설립대회에 출석할 대의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1930년 3월 31일 제3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이 되어 1931년 신간회가 해소될 때까지 활동하였다. 조선운수주식회사 이사 등을 지내던 1930년 4월 4일 마산상공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5월 6일 선운동우회(鮮運同友會)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 1월 6일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3년 4월 22일 마산 중앙야학교의 유지를 위해 그 경영기관으로 마산야학회를 조직하고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7월 마산제2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고, 마산부 표정(俵町, 현 중성동)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을 근거지로 기부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말에는 당국의 창씨개명 강요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고수하였다.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안희제(安熙濟) 등과 연락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944년 8월 여운형(呂運亨)의 주도로 결성된 비밀결사 건국동맹에 참여해 경상남도 조직책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건국동맹이 건국준비위원회로 개편될 때에도 마산지부 위원장을 맡았다. 같은 해 9월 8일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1월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이 창당될 때 경상남도 대표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경남군정청 경남도고문회의 마산대표로도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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