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우
南璋祐1892. 7. 28 ~ 1936. 3. 2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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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2년 7월 28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내가천리(內加川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안성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안성 지역의 만세운동은 3월 11일 읍내에서 5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부르고, 양성면에서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교정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시작되었다. 3월 하순에 이르러서 활발한 만세운동이 전개되어 4월 1일과 2일 양일에 걸쳐 읍내·이죽·일죽·원곡·양성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있었다. 원곡면에서는 3월 25~26일부터 만세운동이 시작되어 3월 28일에는 내가천리의 이시순(李時順)이 독립만세를 발의하였고, 3월 28일과 29일 양일간 최승지(崔承知)·남용희(南用熙)가 지문리 주민들과 함께 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3월 31일까지 원곡면내 각 마을 주민들이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특히 3월 31일 해산할 때도 칠곡리 마을 주민들에게 ‘내일도 모이라’고 전달하였다. 한편 내가천리의 최은식(崔殷植)은 이덕순(李德順) 등과 3월 1일 상경하여 서울의 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3월 3일에 귀가한 후 만세시위를 벌이고자 노력하였다. 3월 28일 이시련(李時連)의 집에서 이시순이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발의하여 함께 있던 인사 일동이 동의하여 이후 만세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4월 1일 오후 8시 원곡면내 내가천리·외가천리·지문리·칠곡리·죽백리·월곡리 등 마을 주민들이 면사무소에 집합하였다. 최은식·홍창섭·이유석·이순익(李順益)·이근수(李根洙)·조경숙(趙敬淑)·남현서(南玄西) 등의 권유와 활동으로 모인 약 1,000여 명 면민들은 면사무소 주위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면민들은 면장 남길우(南吉祐)에게 태극기를 들여 앞세우고 양성으로 출발하였다. 원곡과 양성의 경계인 성은고갯길에서 이유석·최은식·홍창섭·이근수·이덕순·이희룡(李熙龍, 時殷) 등이 원곡, 양성 면내 순사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파괴하자는 연설을 하였다. 원곡면민들은 돌, 막대기 등을 가지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양성으로 갔다. 한편 양성면의 덕봉리·산정리·추곡리·도곡리 등의 마을 주민들은 각 마을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거나 마을 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친 후 읍내로 집합하였다. 읍내로 원곡면민들이 들어오자 합류하여 군중들은 2,000여 명에 이르렀다. 시위 군중은 오후 10시경 주재소 앞마당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순사 다카노(高野兵藏)와 순사보 2명은 계속 독립 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의 위세를 압도되어 도주하였다. 시위 군중은 돌을 던지고 사무실에 석유를 뿌려 불을 놓는 등 집기류와 서류 등 시설물과 비품들을 파괴하고 솔잎으로 불을 피워 주재소를 전소시켰다. 이어서 양성우편소도 파괴하였다. 주재소를 공격하고 파괴하는 시위 대열에 참가한 군중들은 점차 늘어나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시위 군중들은 상점 및 대금업자의 자택, 원고면사무소, 양성면사무소 등에 돌을 투척하고 가재 도구와 사무실 비품을 소각하였다. 이 시위에 참가한 후 많은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일제는 내란죄를 적용하고자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예심을 한 끝에 경성지방법원을 관할 재판소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경성지방법원은 같은 해 8월 10일 ‘공소 불수리’를 선고하였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 소요 등으로 징역 2년(구류 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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