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守凡
守凡1902. 3. 28 ~ 1919. 3.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군북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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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902년 3월 28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소포리(小浦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나범숙(羅凡淑) 또는 나해숙(羅海淑)을 사용하였다. 1919년 3월 20일 군북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함안지역에서는 3월 19일 함안장날 만세시위에 이어 3월 20일 함안군 군북면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지역 시위 양상은 격렬하였고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3월 19일의 함안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던 이들 중 일부는 검거를 피하고, 다음날인 3월 20일 군북 장날에 의거를 감행하기로 계획하였다. 주도자들은 미리 태극기를 제작해놓고, 인근지역에 이 계획을 알리는 등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1919년 3월 20일 전개된 군북면 장날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시위를 벌이기로 한 정오 무렵 주민들과 함께 군북 장터로 나갔다. 이 날 오전 9시에 이미 군북면 동촌리(東村里)의 신창학교(新昌學校)에서 50여 명의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군북 장터에 장꾼과 시위 군중이 넘쳐나자 거사 장소를 군북 냇가로 변경한다는 통지를 받고, 주민들을 이끌고 군북 냇가로 이동하였다. 이어 이 날 오후 1시, 군북 냇가에 모인 3,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대는 우체국과 면사무소를 거쳐 경찰관 주재소를 포위해 독립만세를 외치고, 3월 19일 함안장날 만세시위 때 붙잡힌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시위가 점점 확대되자 마산(馬山) 중포병대대 병력 16명이 비상 출동하여 총을 발사하며 시위대열을 해산시켰다. 하지만 시위대는 대형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작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상인은 물론 농부와 부녀자들까지 독립만세를 부르는 행렬에 합세하면서 오후 5시 시위대 규모는 5,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시위 군중을 이끌며 일본 경찰과 대치하다가 경찰관주재소에서 투석전을 벌이며 유리창과 벽을 파괴하였다. 그러자 일본 군경은 시위 주도 인물에 대해 조준 사격을 감행하고 군중을 향해 소방호스로 검은 물감을 분사하였다. 이날 총격으로 시위 현장에서 21명이 사망하였고, 18명이 중상을 입었다. 당시 선두에 서서 격렬한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군경이 쏜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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