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선
金弼善1903. 5. 23 ~ 1945. 6. 2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신간회 양양지회
- · 강원청년연맹
- · 양양청년동맹
- · 고려공산청년회 강원지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2)
관련 사건
- · 양양군 양양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2) 1903년 5월 23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양양면(襄陽面) 남문리(南門里)에서 태어났다. 양양보통학교(襄陽普通學校)를 8회로 졸업하였다. 기독교인으로 양양감리교회(襄陽監理敎會)를 다니며 청년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무렵 양양면사무소에서 급사로 일하고 있었다. 양양면의 만세시위 준비는 유림과 기독교인에 의해 3월말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기독교계의 만세시위 준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말 경 조영순 전도사의 딸이자 개성 호수돈학교 학생인 조화벽(趙和璧)이 찾아와 건넨 독립선언서를 직접 받았다. 이 때부터 같은 양양보통학교 8회 졸업생이자 평소 같이 교회를 다니던 친구인 김재구(金在龜)·김규용(金圭容)·김주호(金周鎬)·김봉운(金鳳運)·김계호(金啓鎬) 등과 함께 시위를 준비하였다.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이용해서 독립선언서를 복사하고 상여 보관처인 곳집에 숨어 들어가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때에 유림계 지도자인 이석범(李錫範)을 중심으로 시위를 준비하던 임천리(林泉里)의 최인식(崔寅植)과 연락이 닿아 합동으로 시위를 추진하였다. 유림계와 기독교계가 본격적인 준비를 하면서 양양면과 이웃 서면(西面)에 마을마다 책임자를 두고 많은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4월 3일 군수 이동혁(李東赫)과 군청 관리 심운택(沈雲澤)을 앞세우고 관리와 경찰들이 임천리를 급습하여 22명을 체포하고 태극기 374매도 압수되었다. 이때 다행히 검거를 피하여 최인식·김재구·김규용·김계호 등과 함께 거마리(車馬里)에 있는 김종태(金鍾台)의 집에서 밤새 시위를 준비하였다. 4월 4일은 양양 읍내의 장날이었다. 양양면소재지로 들어오는 다섯 군데 길을 따라 들어온 장꾼과 합류한 시위 군중이 몰려들었다. 이때 양양감리교회 청년부원들과 함께 100여 군중을 이끌며 시위를 하였다. 양양 장터는 태극기와 만세 소리로 가득 찼고 독립 선언서가 거리마다 뿌려졌다. 점심때는 시위에 참여한 군중이 더욱 불어나 4,000여 명에 달하였다. 그날 오후에 시위 지도부와 일제 경찰이 임천리에서 체포된 22명의 석방 교섭을 하다가 손양면 가평리(柯坪里) 구장 함홍기(咸鴻基)가 칼에 찔려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시위대는 경찰서와 군청을 공격하였다. 저녁이 되자 시위대는 군청과 경찰서에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둘러 때려 부수었다. 일제 경찰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서 손양면 간리(間里)에 사는 권병연(權炳淵)과 서면 상평리에 사는 김학구(金鶴九)가 즉사하였다. 이때 시위 현장에서 붙잡혔고,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1919년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으나, 그 해 7월 3일 고등법원에서도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양양에서 청년운동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1927년에는 강원청년연맹(江原靑年同盟) 집행위원과 양양청년동맹(襄陽靑年同盟)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10월 31일 동아일보(東亞日報) 양양지국에서 열린 신간회(新幹會) 설립 준비회에서 서무부 담당으로 선출되었다. 11월 18일에는 중외일보 양양지국장으로 부임하였다. 이틀 뒤인 11월 20일에 개최한 신간회 양양지회 설립대회에서는 조사연구부 상무로 선출되었다.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제3차 검거 사건으로 붙잡혔으나, 열흘 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8년 4월에는 영동기자단의 일원으로 강원기자대회를 개최하였다. 1929년 2월 고려공산청년회 간도총국 동만주 책임비서인 박유덕(朴有德)이 주도한 고려공산청년회 강원지부 결성에 참여한 것이 발각되어 다시 붙잡혔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인 1929년 12월 20일 폐결핵으로 보석되어 경성불교자혜원(京城佛敎慈惠院)에서 요양하다가 1930년 1월 22일 양양군 양양면 월리(月里)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몸조리하였다. 그러다가 1930년 12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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