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내홍
朴來洪1892. 10. 7 ~ 1937. 6. 2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민국임시정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관련 사건
- ·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5) 1892년 10월 7일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양보면(良甫面) 운암리(雲岩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 이명은 박만홍(朴晩鴻)·박중래(朴重來)이다. 부친은 한의사로 활동했던 박준형(朴準亨)이었으며, 어려서 고향의 사숙(私塾)에서 8년 동안 한문과 유학을 공부하였다. 1919년 2월경 고종(高宗)의 장례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삼청동(三淸洞) 이상천(李相天) 집에서 머물던 중 같은 해 3월경 중국 허룽현(和龍縣)에서 온 허옥(許玉)을 만났다. 이때 허옥으로부터 중국 방면의 독립운동 상황과 중국에서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사람을 파견하여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국내에서 운동자금을 모집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에 크게 감동을 받아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하였다. 같은 해 4월 고향인 하동으로 내려가 하동시장에서 열린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일로 잠시 하동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풀려났다. 같은 해 8월부터 허옥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라북도 남원군(南原郡) 산내면(山內面)의 기원필(奇元必)에게 전하였다. 여기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자 이후 함께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여 이를 임시정부로 보내기로 맹세하였다. 그리고 각자 거주지에서 부호(富戶)들을 설득하기로 하고, ‘목기(재산가)’, ‘장사(독립운동)’ 등으로 암호를 정해 서로 연락하기로 하였다. 이후 서울 삼청동으로 돌아와 유학을 연구하고 실행하기 위한 단체인 인도강의소(人道講義所) 의원으로 있으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20년 11월 허옥으로부터 재외 동포들이 독립전쟁을 개시하고 있으므로 군자금 모집이 긴급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군자금을 모집해 서간도(西間島)에 있는 독립단(獨立團)에 송부할 것을 권유받았다. 같은 해 12월에는 허옥으로부터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명의로 발행된 1,000원 공채증권(公債證券)과 100원 공채증권, 권총 등을 건네받았다. 이후 이러한 내용의 편지를 기원필에게 보내고 기원필로부터 남원의 상황을 담은 답신을 받는 등 함께 군자금 모집을 준비하였다. 공채증권 등을 거울 뒤에 숨기고 남원으로 가서 기원필과 만나려던 중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일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혀 7개월 동안 고문 취조를 받았다.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및 강도예비죄로 기소되었다. 1921년 4월 23일 경성지방법원 재판에서 강도예비죄는 무죄로 인정받았다. 같은 해 6월 10일 재판에서 징역 1년을 받고 즉시 항소하였다. 1921년 7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2년 7월 11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도 계속 활동을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35년 5월경 다시 일제 경찰에 붙잡혀 극심한 고문과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같은 해 7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또 다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인해 출옥한 지 1년만인 1937년 6월 28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