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윤구
南潤九1892. 4. 2 ~ 1960. 8. 1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노농총동맹
- · 조선노동총동맹
- · 조선공산당
- · 신간회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82)
관련 사건
- · 청진부 만세시위
- · 함북 제2차 공산당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82) 1892년 4월 2일 함경북도 무산군(茂山郡) 동면(東面) 강선동(降仙洞)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농민 집안 출신으로, 이후 함북 청진부(淸津府) 신암동(新岩洞)으로 이주하였다. 남백산(南白山)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고, 종교는 기독교이다. 1919년 청진부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청진에서는 3월 24일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이래 5월까지 읍내 중심지인 신암동을 중심으로 몇 차례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때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았다. 출옥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중등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하였다. 귀국 후에는 여러 단체에 참여하면서 청년운동과 노동운동 등에 매진하였다. 1924년 4월 노동계급의 해방과 노농운동의 전국적 총단결을 주장하며 결성된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에 참여해 50여 명의 중앙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청진지방을 중심으로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을 옹호하는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1925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의 서울청년회 계열이 주도한 전조선노농대회(全朝鮮勞農大會) 준비에도 참여하였다. 1924년 결성된 청진청년회의 대표를 역임하였고, 1926년 1월에는 동북노동연맹 집행위원, 2월에는 함북청년단연합회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4월 조선공산당 함경북도 연락부 책임자가 되었으며, 청진·나남(羅南) 야체이카에 배속되어 활동하였다. 8월에는 함북청년총연맹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9월 종래 노동자·농민 운동의 혼합조직이었던 조선노농총동맹이 조선노동총동맹(朝鮮勞動總同盟)과 조선농민총동맹(朝鮮農民總同盟)으로 분리되었다. 이때 이낙영(李樂永) 등과 함께 조선노동총동맹의 24명 중앙집행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조선공산당 함경북도 청진그룹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 무렵 좌·우 민족통일전선체로 조직된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해 청진지회 집행위원이 되었고,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면서 함북기자동맹회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2월 청진여자고등보통학교의 한인 여학생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려다 발각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그 해 4월 청진기공노동조합(淸津技工勞動組合) 창립대회에 참석하였고, 5월에는 함북청진차기인동맹(咸北淸津借家人同盟)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5월 부터 함북과 간도 일대 조선공산당 당원을 대대적으로 검거한 ‘함북공산당 제2차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고, 1930년 9월 30일 예심이 종결되어 정식재판에 회부되었다. 12월 26일 청진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항소하였다. 그러나 1931년 1월 31일 항소를 취하하여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3년 1월 31일 출옥하였다. 출옥한 뒤에는 교회와 청진체육회 등의 사업에 참여하고, 공락관유지회(共樂館維持會) 간부로 활동하는 등 지역 유력자로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해방 후 남한으로 내려와 청진시민회 회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하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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