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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만춘

南萬春

1892. 8. 20 ~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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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남만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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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노령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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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고려특립중대
  • ·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
  • · 오르그뷰로
  • · 조선공산당

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관련 사건

  • · 러시아내전
  • ·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 창립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0) 1892년 8월 20일 러시아 원동 아무르주 블라고슬로벤노예에서 남창석(南昌錫)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인들이 1871년 개척해 사만리(四萬里)라고 불렀던 블라고슬로벤노예는 아무르강변에 위치한 대표적인 한인 마을이었다. 여동생은 알렉산드라(Александра)와 마리야(Мария)였으며, 남동생은 표도르(Федор)였다. 아내 타이시야 마르코브나 남(Таисия Марковна Нам)과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한인들을 규합해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한인독립운동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고려공산당의 대표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어 활동한 혁명가였다. 또한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소수민족부장으로 1920~1930년대 연해주 한인들의 법적,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고, 교육사업과 문화계몽사업을 전개한 연해주 한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러시아정교 세례명은 파벨 니키포로비치(Павел Никифорович)이다. 1901년 학교를 가기 위해 블라고베센스크로 갔으나 학비가 없어 곧 학교를 그만두었다. 블라고베센스크 신학교 총장 디오니시의 도움으로 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였다. 1908년 치타로 가서 아버지와 함께 군대에 채소를 납품하였다. 1910년 러시아 김나지움 시험에 합격하여 5학년으로 입학하였다. 재학 중 『사상(Идея)』이라는 잡지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차르 러시아에 반대하는 비밀 혁명활동에 참가하였다. 마르크스주의 동아리를 만들어 네르친스크 볼셰비키인 실로프, 브로체킨 등과 관계를 맺고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치타역 철도 창고 파업 실행안을 작성하였다. 파업위원회 지도부의 일원으로 체포되어 잠시 감옥에 갇혔다. 1914년 5월 김나지움을 졸업한 후 의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키예프에 도착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좌절되었다. 10월 5일 차르 러시아군대에 징집되어 키예프군사학교에 입학하여 단기 사관양성 교육을 받고 1915년 2월에 졸업하였다. 졸업 후 소위 후보생으로 임관되어 옴스크 제20 시베리아 비상대대로 발령받았다. 1916년 소위로 진급하였다. 1917년 2월혁명 이후 연대소비에트 군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5월 러시아 제536연대의 5중대 중대장으로 서부전선으로 출정하여 중대를 지휘하다가 7월 전투 중 다리 부상을 입고 예카테린부르크로 후송되었다. 10월 카잔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이후 평생 동안 다리를 절었다. 퇴원 뒤 장교식당 관리인으로 일하다가 1918년 1월 의가사제대 판정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서 비밀리에 사회주의운동에 종사하였다. 1918년 콜차크군에 동원되었지만, 병을 이유로 응하지 않았고 가족과 함께 이르쿠츠크로 도망쳤다. 이르쿠츠크에서 볼셰비키와 계속 관계를 가지면서 한인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공산당 세포를 조직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1920년 1월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이르쿠츠크현위원회 고려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동시에 헝가리인, 폴란드인, 체코인 등 전쟁포로들로 구성된 전투부대인 합동민족연대(인테르나치오날 군대)를 만들어 정치위원과 참모장으로 콜차크군에 맞섰다. 합동민족연대 안에는 한인 35명으로 구성된 고려특립중대가 있었다. 고려특립중대는 이르쿠츠크현위원회 고려부의 지도를 받았다. 합동민족연대는 이르쿠츠크 공방전에 참가하였으며, 승리한 후 3월 소비에트적군 제5군이 이르쿠츠크에 입성하자 사단으로 개편되었는데, 이때 사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20년 이르쿠츠크에서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에 입당하였다. 3월에는 이르쿠츠크현 당대회에서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현위원회 소수민족부장이 되었다. 1920년 7월 7일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전로한인공산당 제1차 대표원회의에 참석하여 코민테른을 대표하여 축사를 하였다. 회의 마지막 날인 7월 15일 선출된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의 제1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8월 26일에는 5명의 중앙위원 중 1인이 되었다. 동시에 교통연락과장을 겸임하여 “해외와 러시아 각 지방 한인 단체와 연계를 수립”하는 임무를 맡았다. 1921년 5월 4일 이르쿠츠크에서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에서 「민족단체와 부르주아단체에 대한 태도」 의안을 보고하였으며, 마지막 날인 5월 15일 선출된 위원장 한명세 등 11명의 중앙위원회 위원 중 1명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한명세, 서초, 장건상, 안병찬 등과 함께 그 해 6월에 열릴 코민테른 제3차대회에 참가할 대표자로 선출되었다. 1921년 6월 2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3차대회에 고려공산당 대표단으로 참석하여 한명세와 함께 의결권을 가진 대의원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대회 석상에서 한국대표단을 대표하여 연설하였다. 대회가 종료된 후 의결권을 갖는 34명의 위원, 심의권을 가진 16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이 확정되었는데 심의권을 가진 위원에 포함되었다. 그 해 가을 코민테른이 부여한 임무를 받아 베이징대학(北京大學) 학생으로 가장해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파견되어 공산주의 비밀 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일본 영사관 경찰의 추적을 받아 위험에 처하게 되자, 검거를 피하기 위해 만주를 거쳐 치타로 귀환하였다. 1922년 10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두 고려공산당을 통합하여 통일된 고려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해 개최된 베르흐네우딘스크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출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소수파로 몰린 이르쿠츠크파가 대회장에서 퇴장하고 치타에서 별도의 당대회를 개최했을 때, 이에 가담하였다. 1922년 10월 러시아 내전이 종결되자 연해주로 돌아와 1923년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극동국 소수민족부장이 되어 1924년까지 근무하였다. 1924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책임자회의에 출석하여 고려공산당창립대회준비위원회(오르그뷰로) 결성에 참여하고 러시아 원동 대표 자격으로 위원에 선임되었다. 1925년 초 모스크바에 파견되었으나 준비위원회와 연계를 단절하고 코민테른 원동부장 보이틴스키와 함께 독자적인 공산당 결성에 나서 그 해 4월 17일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하는데 성공하였다. 9월 조선공산당의 모스크바 파견 대표 조봉암을 도와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잠정 가입을 실현시켰다. 1925년 말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코민테른 극동부 현지기관에서 조선담당관으로 일하였다. 1926년 말까지 조선공산당 중앙기관지 『불꽃이스크라, Искра』의 편집에 종사하고, 국내에서 중국으로 오는 정치적 망명자들에게 재정적 도움을 주는 활동을 하였다. 1927년 1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만주단체협의회에 출석하여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에 관한 정치테제를 보고하였다. 1927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하여 소련공산당 연해주 집행위원 겸 혁명자후원회 회장이 되었으며,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태평양미곡토지개량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다. 1929년에 소련공산당에서 출당을 당하였다가 복당하였지만, 1934년 다시 출당을 당하였다. 1937년 가을 강제 이주 당시 가족과 함께 카자흐스탄 쿠스타나이로 이주당해 처음에는 가축 수매를 관리하는 지방사무소에서 일하였고, 이후에는 쿠스타나이 지방 인민교육부서에서 경제전문가이자 통계원으로 근무하였다. 1938년 5월 일본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10월 12일 내무인민위원부의 판결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당하였다. 1959년 4월 23일 투르케스탄군관구 군법회의에 의해 복권되었다. 러시아어로 된 정치논설 「오늘날의 조선」, 「조선농민의 상태와 농민운동」 등을 발표하였고, 『압박받는 고려(Угнетенная Корея)』(극동도서출판사, 1925년)를 저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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