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김정하

金鼎夏

1897. 10. 14 ~ 1938. 1. 18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정하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함남 이원(利原)노령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이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상해파 고려공산당
  • · 동방노력자공산대학
  • · 외국인노동자출판부

포상 정보

  • · 애국장(2008)

관련 사건

  • · 원동민족대회
  • · 베르흐네우딘스크 고려공산당 통합대회
  • · 국민대표회
  • ·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8) 1897년 10월 14일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서면(西面) 서문리(西門里)에서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자가 다른 김정하(金正夏)·(金政夏)와 이성범(李成範)이라는 이명이 있다. 베르흐네우딘스크 고려공산당 통합대회, 상하이 국민대표회에 참가하고, 김단야 등과 함께 국내에 파견되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펼쳤다. 또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하고 모스크바에서 외국인노동자출판부 한국과 과장을 역임한 러시아 지역 한인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다. 어려서 향리에서 서당을 다니다가 1908년 소학교에 들어갔다. 1909년 도회지의 학교로 옮겼으나, 1년 반 후 학비 문제로 자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1911년 집을 나와 북간도로 가서 한인혁명가들이 설립한 학교에 입학했으나, 생활비 문제로 1년 후 자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2년 땅을 판 아버지의 도움으로 다시 북간도로 건너가 창동학원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 1917년 북간도의 한인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고, 그 해 한인 민족혁명세력과 연결되어 러시아 원동으로 건너갔다. 1917년부터 1918년 봄까지 수찬(水淸) 지역 왕바보재 마을의 한인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1918년 봄부터 1919년 여름까지 수찬 지역의 허포수동 마을에서 한인학교 교사로 있었다. 1919년 3월 연해주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하였고, 블라고베셴스크로 가서 한인학교 교사가 되었다. 아무르주 혁명가들과 연결이 되어 1920년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에 입당해서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아무르주위원회 한인부에서 일했다. 1921년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아무르주위원회의 파견으로 학업을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그러나 모스크바주위원회 한인부에 의해 한인들 사이에서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옴스크로 보내졌다.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다. 당대회 이후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여 1922년 봄까지 학업을 이어갔다.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한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과 민족혁명단체 대표자들의 연석회의인 원동민족대회에 ‘모스크바 고려학생회’의 대표로 김규찬(金奎燦)과 함께 대표단에 포함되었다. 원동민족대회는 원래 1921년 11월 11일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대표단의 도착이 지연되어 개최 일자가 연기되고 장소도 모스크바로 변경되었다. 원동민족대회 한국대표단의 총수는 56명이었다. 모스크바 현지에서도 한국인 유학생과 노동자단체에서 대표가 파견되었는데, 대부분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계열로 대표단이 구성되었다. 상해파인 고려공산당연합중앙에서 파견한 김동한(金東漢)·문시환(文時煥)·이기석(李基錫) 그리고 같은 공산대학생 김규찬, 그리고 모스크바에 소재하는 ‘전러시아 고려노동회’에서 파견한 홍진우(洪震宇), 박 파벨 알렉산드로비치와 함께 상해파를 구성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열린 고려공산당 통합대회에 참가하였다. 자유시사변 이후 1921년 11월과 1922년 4월에 열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한국위원회 결정서들은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양 세력의 연합을 촉구하였다. 이에 양 파는 임시연합간부를 선정하여 당 통합대회를 준비하였다. 그 결과 1922년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시베리아 한복판인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고려공산당 통합대회가 열렸다. 엄윤은 이 대회에 의결권을 가진 대표로 참가하였다. 그러나 대회는 대표자 자격 문제를 둘러싸고 이견이 표출되었고, 소수파의 위치로 전락한 이르쿠츠크파가 대회장에서 탈퇴함으로써 결렬되고 말았다. 베르흐네우딘스크대회가 끝난 뒤 곧바로 상하이(上海)로 파견되었다. 1923년 1월에 개최되는 국민대표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1월부터 6월까지 열린 국민대표회에 고려공산청년회 대표로 참석하여 김규면·박애·김철수·윤자영·박응칠·현정건·왕삼덕·박진·문시환·장기영·이하소 등 상해파 인물들과 함께 개조파에 서서 활약하였다. 국민대표회가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으로 결렬된 후 국내에 파견되었다. 그 후 다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1924년 겨울까지 교사로 일하다가 그 해 12월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연해주위원회의 파견으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으로 돌아갔다. 1925년 1월 이상희·장진원·김동우·강해룡·호정길 등과 함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제적되었다. 제적 이유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벌린 적극적인 분파투쟁 때문이었다. 우랄의 스베르들롭스크로 보내져, 그곳의 ‘붉은 지붕’ 공장에서 일하였다. 그리고 모스크바로 돌아와 플레하노프 경제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28년 이동휘의 셋째 딸 이경순과 결혼하였다. 1929년 6월 말 김단야(金丹冶)·조두원(趙斗元)과 함께 국내로 파견되었다. 서울에서 조두원을 만나지 못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갔다가, 그 해 10월 다시 서울로 와서 김단야를 만났다.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조직위원회가 만들어졌고, 김단야·권오직(權五稷)·박민영(朴珉榮)과 함께 조직위원이 되었다. 1930년 일본 경찰에 수배되었으나 검거를 모면하였다. 1930년 10월 코민테른 동양부의 파견으로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대학원생으로 재차 입학하여 1931년 말까지 공부하였다. 동시에 공산대학 학생들에게 당사(黨史)와 한국어를 가르쳤다. 1931년부터 소련 외국인노동자출판부 한국과에서 과장으로 근무하였다. 야로슬라블시 레카르스카야 거리 12번지에 거주하며 “포베다 라보치흐(노동자의 승리)” 공장에서 경제관으로 근무하였다. 1937년 8월 28일 붙잡혀 총살형을 받고, 1938년 1월 18일 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이후 1956년 12월 6일 복권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윤상원⋮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