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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鍊俊

俊

1896 ~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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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鍊俊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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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북청(北靑)노령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북청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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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이만군대
  • · 대한의용군

포상 정보

  • · 애족장(2002)

관련 사건

  • · 자유시참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2)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에서 태어났다. 자료에 따르면 1896년생으로 추정된다. 유년시절의 행적과 러시아로 이주하게 된 경위는 자세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1920년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다가 사망하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 후 벌어진 내전에 일본군이 시베리아 출병을 감행하자,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곳곳에서 빨치산부대를 조직하였다. 1920년 3월 말 이만(Иман)시 근처 칼린스키구에서 조직된 이만군대에 참가하여 장교가 되었다. 황하일(黃河一), 김 표도르 등이 지도한 이만군대는 120명 1개 중대로 조직되어 6월 말 하바롭스크(Хабаровск) 근처 크라스나야-레츠카(Красная Речка) 전선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후 아무르강을 건너 볼로차예프카(Волочаевка) 근처의 수비대에 진주하며 일본군과의 전투에 수차례 참가하였다. 1920년 말 시베리아 자유시(Свободный, 自由市)에 도착하여 1921년 봄 중국 간도와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 독립군부대들이 조직한 통합군단인 대한의용군에 가담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한 이동휘(李東輝)는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元年)’으로 선포하고, 간도와 연해주의 한인 독립군부대들을 통합하여 대규모 독립군단으로 일본과 독립전쟁을 치룰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와 비밀협정을 체결한 후, 간도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부대들을 시베리아의 자유시로 집결시켰다.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간도 지역에서 이만을 거쳐 자유시(Свободный, 自由市)로 이동한 부대는 홍범도(洪範圖) 부대, 최진동(崔振東)의 독군부(督軍府), 허재욱(許在旭)의 의군부(義軍府),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그리고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였다. 이와 함께 연해주 지역에서도 박일리야의 니항군대(일명 사할린부대)와 김 표도르 등의 이만군대, 최 니콜라이의 다반군대, 박 그레고리 등의 독립단 군대가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1921년 3월 중순 자유시 인근 마자노보(Мазаново)에서 ‘전한의병대회(全韓義兵大會)’가 개최되었고, 그 결과 통합부대로서 대한의용군(사할린특립의용대)이 창설되었다. 이 때 원래 소속되어 있던 이만군대는 대한의용군 제1대대 제1중대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통합부대를 둘러싸고 한인 무장독립운동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하였다. 대한의용군 창설에서 배제되었던 오하묵(吳夏黙) 등 한인자유대대 지도자들이 이르쿠츠크(Иркутск)의 코민테른 원동비서부에 항의를 하였다. 코민테른 원동비서부는 원동 지역을 포함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혁명운동을 총지휘하는 임무를 목적으로 1921년 1월에 조직된 기구였다. 당시 코민테른 원동비서부는 한인사회당과 대척하고 있던 연해주 4월 참변 이후 아무르주로 이동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지도부 인사들과 협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코민테른 원동비서부는 한인사회당의 큰 영향을 받는 대한의용군을 인정하지 않고,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새롭게 창설하였다. 1921년 6월 6일 소비에트 러시아 적군 5군단 산하 카자크 기병 120명과 합동민족연대 내 한인부대 600명을 이끌고 자유시로 온 칼란다리쉬빌리(Н.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는 고려혁명군정의회(高麗革命軍政議會)를 성립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이에 따라 한인부대 통합의 주도권은 대한의용군에서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갔고, 간도에서 온 독립군부대 대부분은 고려혁명군을 통합의 주체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홍범도와 안무, 최진동은 부대를 이끌고 마자노보를 떠나 자유시로 이동했다. 대한의용군의 나머지 부대들도 자유시 외곽 수라세프카의 평원으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다. 이만군대도 수라세프카로 이동하였다. 6월 19일 군간부 전체회의가 소집되어 고려혁명군 중심의 통합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대한의용군을 축소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고려혁명군 편제명령서가 6월 26일 발부되자, 대한의용군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고려혁명군 편제를 둘러싼 불만과 고려혁명군 지도부에 대한 전력 시비로 통합은 다시 어려움에 처하였다. 몇 차례 권고와 타협을 시도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한 칼란다리쉬빌리는 결국 대한의용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하였다. 6월 28일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요청에 따라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자유시 수비대 29연대는 수라세프카 평원에 주둔하고 있던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새벽부터 시작된 무장해제 요청 끝에 오후 2시 20분 무장해제 작전이 실시되었다. 해가 질 무렵에 이르러 강제적인 무장해제가 완료되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대한의용군 측에서는 400~600명 가량이 사망했다고 주장하였고, 고려혁명군은 사망, 도망, 행방불명을 합쳐 약 130명의 피해가 있었다고 공포하였다. 포로는 864명이었다. 고려혁명군은 이들 중 죄질이 무겁다고 인정받은 500여 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이들 중 장교 72명은 이르쿠츠크로 압송되고 나머지는 죄수부대로 편성하여 우수문 벌목장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1921년 7월 30일 이르쿠츠크로 압송된 장교 72명에 대한 재판은 11월까지 계속되어 11월 30일 50명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내려졌다. 3명은 징역 2년, 5명은 징역 1년, 24명에게 집행유예 1년, 방면 27명이었다. 징역 2년을 받은 3명은 대한의용군의 사령관을 역임한 그리고리예프와 김민선(金敏善), 독립단 부대의 지휘관 최성학(崔聲學, 최파벨)이었다. 징역 1년을 받은 5명 역시 각 부대의 지휘관들이었다. 한편, 이르쿠츠크로 압송되는 과정에서 일부 인사들이 탈출을 시도하여 성공했지만, 일부는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르쿠츠크로 압송된 장교들은 혹독한 이르쿠츠크 감옥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이르쿠츠크로 압송된 1921년 7월 30일부터 최종 판결이 내려진 11월 30일 사이에 이르쿠츠크 감옥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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