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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태

朴善泰

1901. 11. 2 ~ 1938.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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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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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수원(水原)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수원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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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01년 11월 2일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남창리에서 아버지 박영선과 어머니 경주김씨 대선 사이의 3남 1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대대로 수원 유지 집안으로 부유한 환경 속에 성장하였다. 수원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18년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수원에서 통학하였다. 이 무렵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집에 머물면서 수원상업강습소의 보조 교사로 일하였다. 1919년 3월 삼일(三一)여학교 학감 김세환(金世煥), 수원상업강습소 교사 김로적(金露積) 등과 함께 수원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자 수원에도 전파되어 3월 20일 이후 만세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나 4월 중순경까지 지속되었다. 이때 만세운동의 연락 책임과 전위대를 맡아 시위대 청년들과 함께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 이후 그 해 9월 독립운동을 계속하고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려다가 삼일학교 교사 이득수李(得守, 일명 이종상李鍾祥)를 만나 수원에서 항일투쟁을 펴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그와 함께 수원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1919년 혈복단(血復團)을 조직하였다. 원래 혈복단은 대한독립애국단이 와해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 김태원과 애국단의 안교일·김교선·신봉균·신상균·이정방 등이 1919년 11월경 서울에서 독립운동 자금의 모집과 독립을 위한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이후 수원 혈복단의 주요 지도자로 1920년 6월까지 수원 일대에서 동지를 규합하고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과 『대한민보』 등을 배포하는 등 독립을 위한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펴기 위해 1920년 6월 7일 수원면 서호(西湖) 부근에서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임순남(林順男)·최문순(崔文順)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이선경(李善卿)을 만나 가입시키고 혈복단을 구국민단(救國民團)으로 개칭하였다. 6월 20일 조직을 구성하고 임원을 선출하였는데, 자신이 단장을 맡고 부단장 이득수, 서무부장 임순남, 재무부장 최문순, 구제부장 이선경 등을 임명하였다. 단장으로서 독립국가를 실현할 것, 독립지사들의 가족을 후원할 것 등 2대 활동 목표로 설정하였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매주 금요일 삼일학교에서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 방침을 협의하였는데, 특히 여학생들은 임시정부 적십자회(赤十字會)에 참가하여 미·일전쟁이 일어나면 간호부로서 참전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후 김석호(金錫浩)·신용준(愼用俊)·김로적 등에게 동지가 될 것을 권유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문서를 국내에 배포하는 등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0년 7월 수원 남문 밖 성공회에서 창립된 진명구락부(進明俱樂部)의 운동부장으로 활동하는 등 청년단체들과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청년운동을 통한 세력 확장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항일 활동을 하다가 1920년 8월 경찰에 붙잡혔다.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상하이를 거쳐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해평대학에 유학하여 동지들을 규합하는 한편 임시정부와도 연계하고자 하였으나,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자 귀국하였다. 1925년 7월 수원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청년단체 수원청년회의 경리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1월 동아일보 수원지국 총무로 취임하여 약 5년 동안 언론인으로 종사하였고, 그 해 10월 민족유일당운동으로 결성된 신간회의 수원지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1929년 3월 중성극지회(衆星劇支會)의 전신인 무대예술을 연구하는 거화회(炬花會) 임시총회에서 임원으로 선출되어 관리부를 담당하였고, 8월 수원청년회의 중심인물이었던 김세환을 위원장으로 수원체육회가 창립되자 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3월 ‘언론의 자유와 여론의 민중부합’을 위한 수원기자동맹 창립대회에서 검사위원에 선출되었다. 1930년 9월 신간회 수원지회의 주도권이 점차 사회주의계열로 넘어가자 집행위원장에서 물러났다. 1938년 6월 6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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