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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泰淵

泰淵

1900. 1. 16 ~ 1938.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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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泰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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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김천(金泉)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김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고려공산청년회

포상 정보

  • · 독립장(2005)

관련 사건

  • · 3.1운동
  • · 김천군 개령면 만세시위
  • · 6.10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2005) 1900년 1월 16일 경상북도 김천군(金泉郡) 개령면(開寧面) 동부동(東部洞)의 중농(中農)이었던 김종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1899년 1월 16일, 1901년 1월 16일에 태어난 것으로 확인된다. 본관은 김녕(金寧)이다. 이명으로 김단야(金丹冶)·김규(金圭)·김추성(金秋星)·김주(金柱) 등이 있다. 이 중에서 김단야로 잘 알려져 있다. 1906년 서당에서 2년간 한문을 수학하였다. 1908년부터 1914년까지 개진학교(開進學校), 진명학교(進明學校), 계성학교(啓聖學校) 등에서 교육을 받던 중, 1916년 미국인 선교사인 학교 교장에 반대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당하였다. 1917년 1월 일본 도쿄(東京)로 건너가 세이소쿠(正則) 영어학원에 입학했지만, 학자금 부족으로 그 해 9월 국내로 돌아와 배재고등보통학교(培材高等普通學校)(현 배재고등학교)에 다녔다. 1919년 『반도의 목탁』이라는 비합법간행물을 발행하는 학생 비밀결사에 가담하고,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신문 등을 통해 국내 각지의 만세 소식을 접하고 고향인 경북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으로 내려와서 1919년 3월 24일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치안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1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재판을 받고,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출옥 후 서울로 올라와 비밀결사 ‘개척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개척단은 만주의 독립군 사관학교에 보낼 학생을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하였다. 개척단의 존재가 일제 경찰에 탐지되자, 1919년 12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0년 쑨원(孫文)의 광둥정부가 설립한 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광둥(廣東)으로 향하였지만, 입학에 실패한 후 상하이로 돌아왔다. 1921년 3월 상하이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기관지 『벌거숭이』 편집인을 맡았다. 그 해 9월 상하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임되었고, 10월에는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1년 11월 고려공산청년회 대표로 선임되어 이듬해에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극동민족대회와 극동청년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이르쿠츠크로 떠났다. 1922년 1월 소비에트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와 원동청년대회에 고려공산청년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해 3월에 상하이로 돌아온 후, 국제공산청년회의 지도를 받아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결성하고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2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상하이에서 국내로 이전하기 위하여 입국하던 중 신의주(新義州)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공산주의 선전 혐의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4년 1월에 풀려났다. 출옥 후, 1924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이 되어 선전부를 맡았다. 도쿄에서 발행되던 『신흥청년』 편집자가 되었고, 이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1925년 1월 상하이로 다시 파견된 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 해 4월 비밀리에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창립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어 연락부 책임자로 코민테른, 국제공산청년회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25년 12월 신의주에서 발생한 ‘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 사건’을 피해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26년 1월부터 7월까지 조선공산당 기관지 『불꽃』의 주필이 되었다. 1926년 4월 순종(純宗) 사망 당시 국내에 비밀리에 잠입하여 만세운동 준비에 착수하였다. 상하이에서 「상(喪)에 복(服)하고 곡(哭)하는 민중에게 격(檄)함」이라는 격문을 만들어 국내로 보냈으나 이것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이른바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 사건’으로 이어졌다. 1926년 8월 코민테른 동방부의 승인을 받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하였다.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 중에 1927년에는 조선공산당 제2차대회 대표자로 파견된 김철수(金錣洙)의 통역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28년에 열린 코민테른 제6차대회와 조선문제위원회에 참석하였다. 그 해 11월 조선문제위원회에 조선공산당 문제를 검토할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이 문서는 「12월테제」 작성을 위한 참고 자료로 활용되었다. 「12월테제」는 1928년 1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채택한 조선공산당 재조직에 관한 결정서이다. 1929년에 국내에 들어와 9월 조선공산당조직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였으나, 그 해 11월에 발생한 검거 사건을 피해 다시 해외로 떠났다. 1930년 2월 모스크바로 건너간 후, 그 해 4월에 코민테른의 임무를 받고 다시 상하이로 파견되어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지도하였다. 이때 잡지 『콤무니스트』 발간을 주도하였다. 1934년 1월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그 해 2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학부 부장으로 선임되어 1936년 8월까지 재임하였다. 재임 기간 중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 『어떻게 콜호즈원은 유족하게 되는가』 등의 한글 팜플렛을 간행하였다. 1938년경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기록에 따르면 1937년 11월 5일 반혁명테러단체 조직과 밀정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후, 1938년 2월 1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위원회 결정에 따라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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