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곤
姜聖坤미상 ~ 미상
관련 단체
- · 27결사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을사5적 및 정미7적 처단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출생지와 생몰 연대는 자료의 한계로 알기 어렵다. 그러나 1910년대 후반에는 서간도(西間島) 지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19년 1월, 27결사대 대원으로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동우(東愚) 이탁(李鐸)이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안태국(安泰國) 등 신민회(新民會) 회원과 만주(滿洲)의 봉천(奉天, 현 심양(瀋陽)) 서탑(西塔)에서 만나 결성한 의열 투쟁 단체다. 결성 목적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 강압과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 이후 광무황제(光武皇帝)를 강제 퇴위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고 결국에는 망하게 한, 매국노들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즉, 이완용(李完用)·권중현(權重顯) 등 5명의 을사오적과 조중응(趙重應)·고영희(高永喜) 등 7명이 대상이었다. 이 두 사건에 이완용은 모두 연루되어 있었기에 11명이 처단 대상이었다. 1910년 8월 나라가 망하자, 서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참여한 이탁은 국내에서 넘어온 많은 청장년과 교류하였다. 이들 중 안경식(安景植)·주병웅(朱秉雄)·차병제(車秉濟)·손창준(孫昌俊)·나경호(羅景鎬) 등 26명과 함께 27명이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단체의 이름은 이들 구성원 숫자에 따라 27결사대라 명명하였다. 결성 당시 27명이었으나 거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계속 증가해 50명이 넘는 단원이었다. 1919년 3월 3일은 광무황제의 국장 일이었다. 국장 행사가 이루어지는 장소에는 아직도 고관대작으로 행세하는 이들 매국노들이 참석할 것이 분명하였다. 따라서 이날을 거사 일로 잡고, 단장 이탁을 포함한 단원들을 3개 대로 선발대를 편성한 후 국내로 잠입하였다. 2월 하순 선발대에 가담해 서울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단원들과 함께 국장 행렬이 통과하는 거리를 답사하며 거사 계획을 짰다. 그런데 국장일인 3월 3일, 봉천에서 무기를 가져오기로 한 운반 조가 도착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든 거사를 성공시키고자 선발대는 망우리 고개에 매복해 노심초사하며 기다렸다. 하지만 결국 도착하지 않아 폭탄은 투척하지 못하고, 매국노들의 죄악상을 폭로한 성토문만 국장 행렬에 투척하고 돌아섰다. 부피가 크고 무거운 무기를 은닉하고 들어왔기에 신속히 이동하기 어려웠던 운반 조는 국장일에 맞추지 못하고 3월 10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 서울에 도착해 권총과 탄환, 단도 등을 넘겼다. 가장 중요한 목표물이었던 매국노 처단에 실패하자 단원들과 함께 차선의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무기를 보급받은 단원들은 군자금 모집에 나섰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때 한창 무르익은 만세 시위에 참가하여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시위를 이끌기도 하고, 빛바랜 독립문의 태극기를 선명하게 색칠하였으며, 시내를 다니며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알린 벽보를 부착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차병제·손창준·박기한(朴基寒) 등은 서울에서 새로 단원이 된 이우영(李宇榮)·이기원(李基原) 등과 서울 시내 부호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나머지는 조를 구성해 각자의 임무를 정해 움직였다. 군자금 모집 조에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태극기 색칠과 벽보 부착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분담해 활동을 벌이던 중, 부호 너덧 집을 다니며 군자금을 모집하던 손창준·이우영·안경식·박진태(朴鎭台)·이기원·박기한 등이 5월 5일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동지들이 체포되어 활동이 더는 어렵게 되자 활동을 접고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결사대 본부가 있는 서간도로 돌아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단장 이탁 또한 사선을 뚫고 본부로 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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