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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훈

姜錫勳

1896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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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강석훈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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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북 종성(鍾城)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북도 종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국장(1996)

관련 사건

  • · 1919년 대한국민지회총회
  • · 1921년 신건동주재소 전투
  • · 1922년 맹호단의 시국비판 강연회 및 국민대표회의속회촉구 선언서 발표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6) 1896년 함경북도 종성(鍾城) 출신으로 이명은 강만길(姜萬吉)이다. 22세가 되던 해인 1917년 3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만주 지린성(吉林省) 훈춘현(琿春縣) 대황구(大荒溝)의 북일중학교(北一中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군무부(軍務部)에 소속되어 한인 무장부대 규합 및 국내 진출을 시도하였다. 동년 7월 신광삼(申光三)과 함께 50여 명의 대원을 모집하여 함북 무산군(茂山郡) 진출을 계획하였다. 같은 해 9월 19일에 훈춘에서 개최된 대한국민지회 총회(大韓國民支會總會)에 참석해 독립군을 무장하고자 무기 구입을 기획하였다. 1920년 6월에는 황태식(黃泰植)·김운서(金雲瑞)와 함께 3개 지대, 70여 명의 요원을 모집하여 국내 진입을 계획하는 등 계속해서 한인 요원 모집 및 국내 진공에 매진해 일제와 중국 관헌의 집중적인 감시를 받았다. 1920년 10월의 청산리대첩 직후 러시아 시베리아로 건너가 시지미(Sidimi)의 강병관(姜秉官) 동생 강룡관(姜龍官)의 집에서 김학섭(金學燮)과 강병관을 만났다. 청산리대첩 이후 악화된 일제의 탄압 때문에 대규모 군사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동년 12월 국내 일본 기관 파괴와 일본 주구 암살 등의 직접 행동을 목표로 문창학(文昌學)·최시능(崔時能)·최영찬(崔英燦) 등을 규합해 임시대한독립군(臨時大韓獨立軍)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1921년으로 예정된 ‘워싱턴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로 계획하고 그를 위한 전공(戰功) 달성을 목적으로 국내 진입 및 일제와의 투쟁을 결의하였다. 그 첫 번째 과제로 함북 웅기(雄基)의 경찰서·금융조합사무소 폭파와 무기, 군자금 확보를 계획하였다. 임시대한독립군은 국내 진입 결사대 15명을 총 3개 지대로 편성하였다. 결사대장(決死隊長)을 겸한 김학섭 등 5명이 제1지대, 김병관 등 5명이 제2지대를 구성하였을 때 제3지대장에 임명되어 4인의 결사대를 이끌었다. 이들은 웅기에 진입하려고 1921년 오소리강(烏蘇里江)을 건너 만주 훈춘현 홍룡구(紅龍溝)로 이동하였으나 연초 경계가 엄중해 웅기까지의 국경 진입이 어려웠다. 이에 문창학이 제의한 홍룡구 근방 함북 신건동(新乾洞)의 일본주재소 공격으로 목표가 수정되었다. 1, 2지대에겐 신건동 입구 좌우의 고지를 점령해 수비대의 출동을 막는 임무가, 강석훈의 3지대에게는 주재소의 직접 공격 임무가 부여되었다. 임시 대한독립군은 1921년 1월 5일 오전 1시부터 공격을 감행하였다. 김학섭과 강병관의 1, 2지대가 신건동 입구 좌우 고지의 신건동 수비대의 출동을 막는 틈을 타 3지대가 얼어붙은 두만강의 오룡천(五龍川)을 도강해 신건원주재소를 공격하였다. 40여 분의 교전 끝에 임시대한독립군은 일본 순사 송기안태랑(松崎安太郞)을 사살하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전과를 달성한 뒤 연해주로 돌아갔다. 1921년 10월 하순부터는 훈춘현 춘화경(春化鄕) 관대구(寬大溝)에서 최경천(崔慶天)을 수장으로 하는 한민회(韓民會)에 참여해 포병대장 겸 군무부(軍務部) 중대장에 임명되어 최두철(崔斗哲)·한창규(韓昌奎) 등 무장대 8명을 이끌었다. 1922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존폐를 둘러싸고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개최가 가시화되자 상하이 조계지에 머물면서 이한호(李漢浩)·박태열(朴泰烈)·김성득(金成得) 등의 9명의 동료와 맹호단(猛虎團)을 조직, 윤해(尹海)·한형권(韓亨權)·남형우(南亨祐) 등의 창조파를 지원하였다. 맹호단은 동년 8월 4일 상하이 서문 밖 미술학교에서 시국을 비판하는 강연회를 개최하고, 9월에는 연서로 국민대표회의주비회의 후원과 국민대표회의의 속회를 주장하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해 국민대표회의 개최를 압박하였다. 1923년 1월 31일 국민대표회의 개최식 때는 국민대표회의 의장 김동삼(金東三)의 개회사, 신숙(申肅)의 연설에 이어 세번째로 기념 연설을 하였다. 1923년 5월 26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진행된 ‘신건동주재소 습격사건(新乾洞駐在所襲擊事件)’ 재판에서 김학섭·강병관·문창학 등과 더불어 살인과 폭발물취체법 위반으로 사형을 구형받았다. 그러나 체포되지 않고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하는 등 활동을 지속하였다. 1923년 말엽에 이르러 일제에 체포되어 국내로 이송되었고 11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순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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