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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容根

容根

1917. 10. 28 ~ 1980.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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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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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康津)학생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강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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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17년 10월 28일 전라남도 강진군(康津郡) 학천면(鶴川面) 현산리(峴山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김용옥(金容玉)을 사용하였고,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금정용근(金井容根)으로 고쳤다. 1933년 4월 평양사립숭실중학교(平壤私立崇實中學校) 2학년으로 입학해 1937년 3월에 졸업하였다. 1937년 전남 목포부 창평정(昌平町)에 거주하며 5월 25일부터 7월 13일까지 영광군(靈光郡) 염산면(鹽山面) 야월리(野月里)의 개량서당(改良書堂)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때 교실에서 매일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드리는 예배가 끝난 이후 학생들에게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약탈을 당했지만 기독교에서 사랑으로 보답하라는 말씀처럼 일본인을 사랑으로 대해야 하고, 영적인 부패가 계속되고 있는 조선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면 독립하게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 하며 은연 중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7월 13일에는 친구인 조동현(曺東絃)을 비롯하여 학생 4~5명과 대화하던 중 신문에서 본 중일전쟁에 대한 내용을 전달하였다. 이러한 발언이 문제가 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37년 10월 30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육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38년 4월 14일 풀려났다. 1940년 4월,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에 입학하였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1941년 6월, 통학 중 같은 학교 문과생인 강천복인(江川福人)에게 “조선 농민은 일해도 먹기가 곤란하고 채무로 집과 밭을 팔고 만주나 북선(北鮮)까지 날품팔이를 떠나야 하는데, 이는 일본인의 착취 때문으로 우리가 불쌍한 조선의 농민을 구제하는 것이 책무”라고 말하였다. 또한 9월 중순에는 동료인 성백우(成百愚)와 조선 농민이 채무 때문에 피폐해진 것은 일본의 압정(壓政)의 결과이며, 이를 벗어나게 해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는 등 항일의식을 드러내는 활동을 하였다. 1941년 9월 25일, 학교를 잠시 휴학하고 목포로 내려가, 10월 초순부터 목포부 온금동(溫錦洞)에 위치한 초등학교 수준의 사립 온금학원(溫錦學院)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시국담을 나누었다는 일로 다시 붙잡혀 1943년 3월 1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에 산입)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조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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