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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應植

應植

1897. 7. 19 ~ 1944.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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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應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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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의주(義州)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북도 의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대한광복군총영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선천경찰서 투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7년 7월 19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이병현(李炳賢)을 사용하였다. 유년기부터 1919년 이전까지의 활동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강변 8군 임시교통국 (江邊八郡臨時交通局) 참사(參事)’로 활동했고, 1920년 9월 1일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摠營) 결사대 소속으로 평안북도 선천군청 폭파 의거에 참여하였다. 1919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홍범도(洪範圖) 독립군 부대와 일본군의 교전 사실을 조사하고, 독립신문사 지국(支局)들을 점검하기 위해 ‘강변 8군 임시교통국 참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홍범도 부대는 함경남도 갑산군(甲山郡)과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자성군(慈城郡) 등지에서 일본군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오동진(吳東振)과 함께 ‘강변 8군 임시교통국 참사’로 임명되어 국내로 파견되었다. 파견 기간 중 독립군 부대에 대한 조사 정보는 이후 『독립신문』에 보도되었다. 국내에 파견된 이후 서울로 잠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김찬영(金賛永), 최지화(崔志化) 등을 중심으로 음악부(音樂部)를 조직하고, 중국과 미국 등지를 무대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에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현 연세대학교) 음악교수 김영환(金永煥)과 신파극(新派劇) 흥행업주(興行業主)인 김도산(金陶山) 등을 만나 독립운동 자금 모집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탐지한 일제 경찰들이 관련 인물들을 검거했을 때, 무사히 체포망을 빠져나와 임시정부로 복귀하였다. 1920년 8월 만주 콴뎬현(寬甸縣)에 근거지를 둔 대한광복군총영에서 결사대(決死隊)로 선발되어 선천역(宣川驛)과 선천경찰서(宣川警察署) 폭파 계획에 참여하였다. 대한광복군총영은 “적의 통치기관인 건축물 파괴와 적괴(敵魁)·창귀배(倀鬼輩) 암살, 적의 행정 기관의 문란”을 목적으로 1920년 7월 1일 중국 단둥현(安東縣)에서 설립되었다. 대한광복군총영의 총영장(摠營長)은 오동진이었다. 1920년 7월 5일 미국 의회 상·하원 의원 42명과 그 가족들로 구성된 동양시찰단 일행 100여 명이 필리핀과 중국·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 때 미국의원단이 8월 23일 중국 펑톈(奉天)을 출발해 신의주(新義州)를 거쳐 24일 서울을 방문하고, 25일 부산(釜山)을 거쳐 도쿄(東京)로 이동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대한광복군총영은 미국의원단의 한국 방문에 맞춰 일제 식민지배의 부당함을 알리고, 국내 독립운동의 기세를 돋우기 위해 결사대(決死隊)를 조직해 다발성 폭탄거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대한광복군총영은 서울과 평양(平壤), 선천(宣川), 신의주 등의 지역에서 거사를 진행하기 위해 결사대원 13명을 선발해 3개 대로 나누어 밀파하였다. 이 때 평안북도 선천(宣川) 방면의 거사 임무를 부여받고, 이학필(李學弼)·임용일(林龍日)과 함께 8월 20일 경 선천으로 파견되었다. 1920년 8월 21일 선천에 도착하여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재학생인 박치의(朴致毅)와 교회 장로인 박치조(朴治祚) 형제를 비롯한 기독교 계통의 동지들을 만나 의거를 준비하였다. 이들은 무력시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8월 24일 선천역과 선천경찰서를 폭파하고, ‘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과 격문(檄文)을 배포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학필이 거사에 필요한 무기를 가져오기 위해 대한광복군총영 본부가 있던 콴뎬현으로 향했지만, 일제 군경의 국경 감시 강화로 인해 거사일이 지난 8월 30일에서야 권총 1정과 소총 1정, 폭탄 2개를 가지고 선천으로 돌아왔다. 미국의원단이 이미 서울로 떠나버렸지만, 상의 끝에 늦었더라도 거사를 결행하는 것이 옳다고 의견이 모아져, 일정과 대상이 재조정되었다. 새로운 거사 날짜는 천장절(天長節, 일왕의 생일)인 8월 31일로 하고, 선천경찰서와 함께 선천역 대신 선천군청(宣川郡廳)이 새로운 대상으로 결정되었다. 박치의와 이학필은 선천경찰서를 폭파하고, 선천군청을 임용일과 함께 폭파하기로 임무를 나누었다. 1920년 9월 1일 새벽 3시경 임용일과 선천군청으로 가서 토지대장을 보관하고 있는 지적창고(地籍倉庫)에 폭탄을 던졌지만 불발되었다. 그러나 박치의와 이학필은 선천경찰서를 폭파하고, 경고문과 격문을 배포하는 데 성공하였다. 선천경찰서에 뿌려진 경고문과 격문을 단서로 수사가 시작되어, 1920년 9월 7일 신성중학교 기숙사에서 박치의·이학필과 함께 붙잡혔다. 임용일은 이 때 일제 경찰들의 체포망을 뚫고 만주 지역으로 돌아갔다. 1921년 4월 1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8년 8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임용일의 재판에 증인으로 채택되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후의 활동은 확인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오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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