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用茂
用茂미상 ~ 192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2010)
관련 사건
- · 고마령참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0)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에서 태어났다. 출생연도와 유년기부터 1923년까지의 행적과 활동은 확인하기 어렵다. 자료에 따라 김용무(金用武)라는 이름으로 나오기도 한다. 1924년 대한통의부 의용군(大韓統義府 義勇軍) 소속으로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데 힘썼다. 대한통의부 의용군은 항일독립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922년 8월 군정서(軍政署)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대한정의군영(大韓正義軍營), 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摠營) 등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들이 교섭하여 설립한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확대·개편한 조직이다. 1924년 2월 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중국 퉁화현(通化縣) 보갑장(保甲長) 저우치산(周歧山)과 교섭하였다. 이때 저우치산이 무리하게 금전을 요구하자 갈등이 격화되었고, 양측 간에 교전이 발생하였다. 이 날 교전으로 인하여 함께 교섭 자리에 참석했던 김상진(金尙鎭), 최덕희(崔德熙) 등 6명의 단원과 중국 보갑대원 1명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한편 1922년부터 대한통의부 내에서는 복벽주의 계열 인사들과 공화주의 계열 인사들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1922년 10월 14일 콴뎬현(寬甸縣)에 있던 공화주의 계열 인사인 양기탁(梁起鐸) 일행을 복벽주의 전덕원(全德元) 계열의 병사들이 습격하면서 두 계열 간의 갈등이 깊어졌다. 결국 1923년 1월 대규모 유혈사태를 겪고 난 후, 전덕원을 비롯한 복벽주의계 인사들은 1923년 2월 대한통의부에서 분립하여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를 설립하였다. 이때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 채찬(蔡燦, 일명 백광운(白狂雲)) 등은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의 주도하에 양측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대한통의부 의용군에서 분리하여 나온 제 1·2·3·5중대는 192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휘 아래 통합할 것을 촉구하는 남만군인대표(南滿軍人代表)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때 제1중대장 채찬과 함께 육군군사의회(陸軍軍事議會) 제1중대원으로 함께 서명하였다. 1924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육군주만참의부(이하 참의부)가 결성되자, 제1중대장 채찬이 이끄는 부대에 소속되어 활동하였다.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채찬 등 17인과 함께 연명으로 ‘통고내외동포(痛苦內外同胞)’라는 격문을 작성하고 배포하며, 친일 부호들에 대한 경고와 군자금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이후 1925년 2월 26일, 중국 지안현(輯安縣) 구마링(高馬嶺)에서 열린 군사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기 위해 참의장(參議長)과 제2중대장을 겸임하고 있던 최석순(崔錫淳)과 대원들이 두 집으로 나누어 묵으면서 진행되었다. 회의에 관한 정보는 밀정에 의해 평안북도 초산경찰서(楚山警察署)에 알려졌다. 한인 순사와 밀정이 첩보를 접수하여 일본 경찰 60여 명이 구마링으로 출동하였고, 참의부 통신원인 김명준(金明俊)이 붙잡히면서 회의 장소가 노출되었다. 회의를 진행하던 참의부 대원들과 함께 포위를 당하면서, 갑작스런 일본 경찰의 습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전에 나섰다. 이때 참의장인 최석순을 포함하여 전창희(田昌禧)·최항신(崔恒信)·전덕명(全德明)·안정길(安貞吉)·김학송(金鶴松)·반창병(潘昌炳)·최길성(崔吉星)·백명호(白明浩)·장경환(張鏡換) 등 약 28명의 대원들과 함께 교전 중 사망하였다. 이 사건은 ‘고마령참변(古馬嶺慘變)’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오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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