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성
南精性1916. 12. 10 ~ 1950. 7. 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창유계(暢幽契)
포상 정보
- · 애족장(2018)
관련 사건
- · 창유계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8) 1916년 12월 10일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 원남면(遠南面, 현 울진군 매화면(梅花面)) 금매리金(梅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양(英陽)으로 제주목사를 지낸 정일재(精一齋) 남회(南薈)의 18대 종손이다. 이명은 남정규(南精奎)이다. 원남공립보통학교(遠南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익혔으며 이후 묘목 농장을 운영하였다. 1940년대 항일운동단체인 창유계(暢幽契)에서 활동하였다. 창유계(暢幽契)는 전통적 공동체 운영 방식인 계(契)를 활용한 비밀결사로, 겉으로는 여럿이 모여 한시를 읊거나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으로 위장한 조직이었다. ‘창유’라는 명칭은 당시 울진 지역의 한학자 남진영(南軫永)이 왕희지(王羲之)의 이름난 문장인 「난정기(蘭亨記)」중 ‘술 한 잔 마시고 시 한 수 읊으니 그윽한 마음 활짝 펴기에 충분하도다(一觴一詠)에 (亦足以暢敍幽情)’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1939년 10월경 남원수(南源壽)의 권유를 받고 울진면(蔚珍面) 읍내리(邑內里) 월변동(月邊洞)에서 임시헌林(時憲) 등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조국 독립 실현을 위한 계 조직을 제안하자 동참하기로 하였다. 1940년 5월 임시헌 등과 다시 회합했으며 정식으로 창유계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창유계 결성을 주도했던 남원수 등 9명은 1938년 2월부터 준향계(準香契)를 조직하여 항일 활동을 하고 있었다. 창유계는 비밀 엄수와 단결, 동지 모집 등의 행동 방침을 정했으며, 울진농민조합의 조직과 운영에 참여하여 경험이 풍부한 최학소(崔學韶)의 지도를 받아 운영되었다. 점차 조직을 확장해 나가며 1942년 5월까지 64회의 모임을 가졌다. ‘죽음으로써 투쟁하자’는 구호로 결의를 다졌으며 국내 민족의식 고양을 위한 선전물을 제작·배포하였다. 조직이 확장되자 활동의 편의와 계원 자격 등을 고려해서 남복이(南福伊)를 계장으로 하는 창유계, 최효대(崔孝大)를 계장으로 하는 준향계, 주예득(朱禮得)을 계장으로 하는 후란계(後蘭契), 독서회 등으로 조직을 재정비하여 활동을 이어갔다. 1943년 3월에는 충칭(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연계하기 위해 남원수와 장세전(張世銓)을 차례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로 향하던 남원수가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장세전은 출발 직전이었던 3월 19일에 붙잡혔다. 일제 경찰은 최황순(崔晃淳)의 집에서 발견한 사진과 검문 중 입수한 계회 집회 통지서를 이용해 창유계원을 추적하였다. 결국 창유계원 102명이 붙잡혔고, 이 가운데 41명이 구속되었다. 최황순 등 6명은 울진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다 사망했으며, 다른 10명은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102명의 계원이 붙잡힐 당시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44년 5월 31일에 예심이 종결되었다. 1944년 7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으나 1944년 10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었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겪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5일 울진군 죽변면(竹邊面)에서 국군에 의해 사망하였다. 2009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울진 국민보도연맹 사건’의 민간인 희생자임을 밝히고, 국가의 사과와 위령, 역사 기록 수정 등의 조치를 권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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