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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두

金一斗

1891. 4. 12 ~ 1967.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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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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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순창(淳昌)임시정부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순창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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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민국 임시정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80)

관련 사건

  • ·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80) 1891년 4월 12일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동계면(東溪面) 동심리(同心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추산(秋山)이며, 이명으로 김진동(金鎭東)·김환(金煥)을 사용하였다. 1910년 9월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하여 롱웨이(榮衛)대학 의학부에서 수학한 뒤 의사가 되었다. 졸업 후 중국 정부 임정국(林政局)에 취직하여 만주 지린성(吉林省) 순화현 대천구에서 임정국 관리로 2년 동안 근무한 다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1년간 의사생활을 하다가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와 2년 동안 남만병원(南滿病院)을 경영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직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국(交通局)에서 활동하던 중, 군자금 조달 등의 임무를 띠고 교통국 통신원으로 국내로 파견되었다. 서울 인사동 호해여관(湖海旅館)에 머물며 자신을 ‘임시정부 교통원장(交通院長)’이라 소개하며 군자금 모집활동에 착수하였다. 1920년 3월 초순 고향 인근인 전라북도 정읍군(井邑郡) 칠보면(七寶面) 반곡리(盤谷里)의 부호 김영섭(金泳燮)에게 임시정부 특파원 4명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김영섭이 부재중이어서 동생 김홍섭에게 군자금 2만원을 요구하였으나, 소지한 현금이 없기에 김영섭이 귀가하면 군자금을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후 약속한 대로 군자금을 기부하지 않자, 1920년 5월 20일 직접 김영섭의 친구로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는 반곡리 인근 시산리(時山里)에 거주하는 이희섭(李喜燮)을 찾아갔다. 이희섭의 집으로 김영섭을 불러 앞의 임시정부 특파원에게 약속한 군자금 2만원을 요구하고 1차로 200원을 받았다. 이어서 두 차례에 걸쳐 호해여관에서 이희섭으로부터 400원을 전달받았다. 이후 붙잡혀 1921년 3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5월 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그 해 6월 2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옥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모색하여, 이전 자신이 경험한 독립군기지 개척 방식으로 둔전병(屯田兵)을 양성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지리산에 독립군기지를 만들어 독립군 병사를 양성하기 위해 다시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우선 전라남도 장성군(長城郡)에 사는 개벽사(開闢社) 사원 반준모(潘俊模)를 동지를 포섭한 뒤, 전라북도 김제군(金堤郡) 일대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하였다. 1926년 5월 15일 김제군 수류면(水流面) 구월리의 부호 김성준(金成俊)을 찾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원이라고 밝히고, “지리산에 많은 부하 병졸을 데리고 있다”고 하였다. 권총을 내보이며 군자금을 요구한 다음 7월 4일 다시 반준모와 함께 김성준을 찾아갔다가, 원평경찰관주재소 경찰에 붙잡혔다. 그 해 10월 29일 전주지방법원에서 다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1967년 10월 7일 사망하였고, 전주 덕진공원에 ‘의사 추산 김일두 선생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용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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