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泰燁
泰燁1902. 12. 13 ~ 1985. 5. 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우애회
- · 도쿄 조선노동동맹회
- · 조선무산자사회연맹(오사카)
- · 조선노동학교
- · 신진회
- · 조선인중앙협의회백의노동신우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09)
관련 사건
- · 도쿄 조선노동동맹회 사건
- · 조선무산자사회연맹 사건
- · 선우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9) 1902년 12월 13일 경상남도 동래부(東萊府) 부산면(釜山面) 대저(大渚)에서 김두한(金枓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할아버지는 김규홍이고, 항일 운동가 김두봉(金枓奉), 김약수(金若水)와는 집안 친척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김규홍이 기장군의 이방에서 물러나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이후 가족은 진주(晋州)와 남원(南原) 등지를 전전하다가 1910년에 전라북도 운봉군(雲峰郡, 현 남원시(南原市))에 정착하였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머슴살이를 하다가 1915년에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오사카(大阪)의 여러 공장에서 일하면서 민족 차별과 노동 현장의 열악한 실태를 체험했고, 노동자의 현실에 눈뜨게 되었다. 1916년 일본노동총동맹의 전신이자 현재 사회당의 근간이 된 우애회(友愛會)의 노동 강좌를 들으며 노동자 의식을 키웠다. 1920년 도쿄(東京)로 이주하여 노동자로 일하면서 주변의 권유로 공부를 시작하였다. 3월에 세이소쿠학원(正則學園) 고등학교 야간반에 들어가 대학 입학을 준비하였고, 6월에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학과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계림장(鷄林莊)에서 양주도(梁柱東)·안막(安漠)·김우진(金祐鎭) 등과 교유하였다. 1922년 11월 북풍파 사회주의자 이헌(李憲) 등과 함께 도쿄 조선노동동맹회(東京朝鮮勞動同盟會)의 창립에 참여하여 일본인과 한인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함께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한인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일본에 거주하는 한인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도 전개하였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때에 재일조선인에 대한 대검거 와중에 붙잡혔다가 60일 후에 풀려나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관동대지진 당시 한인들의 희생을 규탄하는 임무를 띠고 오사카로 갔다. 1924년 3월 10일 나카노시마(中之島) 공회당에서 ‘조선인학살사건규탄대회’를 개최하고 사회를 맡아 대회 종료 후 붙잡혔다가 1개월 후 석방되었다. 같은 해 6월 최선명(崔善鳴)·고순흠(高順欽) 등과 함께 ‘조선무산자사회연맹’을 조직하고 동월 28일 천왕사(天王寺) 공회당에서 개최된 동 단체 주최의 연설회에서 한인 노동자문제와 관동대지진 당시 한인 학살 사건에 대해 연설하다가 다시 경찰에 연행되었다. 1925년 3월 김수현(金守顯) 등과 조선노동학교를 창설하여 소년교육에도 힘썼다. 1926년 1월 친일파 이선홍(李善洪)이 주도한 선우회(善友會)의 창립대회에 찾아가 반대 연설을 하고 청중들과 함께 무산시켰다. 이 일로 인해 관계자들이 검거되었고 가택 수색을 당하였다. 1926년 1월 16일 이춘식(李春植)과 함께 신진회(新進會)를 조직하였다. 오사카에서 약 500명의 회원들이 모인 가운데 열린 결성식에서 신진회는 민족의 참된 이익을 위해 활동할 것과 친일단체인 조선인협회의 박멸을 결의하고 회장에 이춘식, 부회장에 고제균(高濟均)·윤혁제(尹革濟) 등을 이사와 간사로 선출하였다. 신진회는 오사카지역 한인들의 주거권 확보와 해고 방지문제, 직업소개 등 생존권과 관련한 여러 현안들을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한편 오사카 최초의 한인 신문사인 자아성사(自我聲社)를 설립해 『자아성(自我聲)』을 발간하였다. 신진회는 자아성사를 비롯해 조선인신우회(朝鮮人信友會)와 수평사 본부, 문명비평사(文明批評社), 교토의 백의인사(白衣人社)와 와카야마(和歌山)현의 조선인자유노동조합(朝鮮人自由勞動組合) 등 일본 관서지방의 한인 민족단체들을 규합해 1926년 5월 조선인중앙협의회(朝鮮人中央協議會)를 조직하였다. 1926년 12월 한인 자유노동자가 많았던 북릉(北陵)으로 가서 토야마(富山)를 본거지로 삼아 노동운동을 하였고, 1927년 8월에 백의노동신우회(白衣勞動信友會)를 결성하여 여러 노동쟁의에 관여하였다. 1931년 다시 붙잡혔고 1935년 9월 출옥과 동시에 국내로 추방되었다가 1939년 12월 일본으로 돌아가 노동자들을 찾아다니며 강연 활동을 하였다. 1944년 12월 귀국한 뒤에도 노동운동에 주력하였다. 1946년 3월 10일 서울에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 설립되자 부산지구 초대 위원장이 되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의 정치도구화에 반대하며 1949년 7월에 부산지구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李承晩) 정권이 붕괴한 후 1961년 1월 장건상(張建相)을 당수로 결성된 혁신계 정당인 혁신당의 부위원장으로 잠시 몸담았지만 곧 사임하였다. 1980년대에 사회 민주주의 계열의 정당인 사회당(1980년)과 사회민주당(1985년)의 고문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방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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