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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봉우

姜鳳羽

1892. 2. 5 ~ 1970.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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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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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함흥(咸興)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함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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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105인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92년 2월 5일 함경남도 함흥(咸興)에서 태어났다. 소작농 출신으로 기독교(장로회) 신자였다. 105인사건 피의자로 구속되었을 때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동휘(李東輝)가 함흥에 설립한 보창학교(普昌學校)에 재학 중 1907년 학교가 폐쇄되자 나라에 신명을 바치겠다는 뜻으로 여러 동지와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행하였다. 그해 음력 7월 동지 김병권(金秉權)·장석함(張錫咸)·오임규(吳任奎)·김창현(金昌鉉)·최구덕(崔九德)·한용복(韓用福)·백명락(白明洛)·강상황(姜尙潢)·김봉서(金鳳瑞)·김동록(金同綠)·장호섭(張昊燮)·김재수(金在洙) 등 17명의 동지와 함께 오른손 무명지(無名指) 제1관을 절단하였다. 이들 중에는 무명지만이 아니라 무지(拇指)와 식지(食指) 그리고 소지(小指)까지 절단한 동지도 있었다. 이들 17인은 이를 계기로 단지동맹회를 조직하였다. 단지동맹의 소식을 이동휘에게 전해준 사람은 동지동맹 결행자의 한 사람인 김병권이었다. 이동휘는 이 사실을 곧바로 이승훈(李昇薰)에게 알려 단지동맹을 결행한 김병권·강봉우 등 5인을 엄격한 입회 시험 과정을 생략한 채 평양 자기회사와 신민회 회원으로 특별 입회시켰다. 이때 김병권 등과 함께 5인에 포함되었다. 본래 신민회 입회 절차는 매우 엄격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평소 밀접한 인맥과 기맥을 맺고 있는 인물 중에서 회원 후보를 선정하였다. 그 후 다시 여러 차례의 검증 과정, 곧 투철한 애국심과 희생정신 등을 확인하는 등 6개월 이상의 관찰 기간을 거친 후 비로소 신민회 입회 여부를 결정하였다. 단지동맹을 통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확고한 애국정신과 실천 의지가 확인되었기에 특별한 시험 과정을 생략한 채 입회가 허락되었다. 17인이 결행한 단지동맹은 안중근(安重根)의 그것보다 1년 6개월 앞서 결행된 것이기에 더욱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자신이 신민회 회원인 줄은 몰랐다. 철저한 비밀 조직이었던 신민회는 조직 자체를 일절 비밀로 하였기 때문이다. 105인사건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신문을 받을 때 자신은 이동휘의 부하이며 국가를 위해 단체에 가입하였으나 그 단체가 신민회인 줄은 몰랐다고 진술하였다. 이렇듯 신민회는 비밀 조직체로 회원 자신은 물론 회원 간에도 서로 모를 정도의 점조직이었다. 1911년 10월 105인 사건, 즉, ‘데라우치 총독 모살미수 사건(寺內總督謀殺未遂事件)’ 피의자로 구속된 후 서울로 압송, 총독부 산하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어 6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당시 동원된 고문 방법은 72종에 달하였는데 이 중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문이 잠을 재우지 않는 것과 여러 날 동안 밥을 굶기는 고문이었다. 물리적 고문으로는 온몸에 기름을 바른 후 단근질하는 고문과 천장에 매달아 놓고 방망이 등으로 후려치는 고문을 하였는데, 한 번 시작하면 1시간에서 4시간까지 계속하는 경우가 있었다. 한마디로 반인륜적인 고문 방법을 동원해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105인사건 피의자 대부분은 견딜 수 없는 고문으로 결국 ‘총독을 모살하려 하였다’는 허위 자백을 진술하였고 이를 유일한 근거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2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 공판이 열렸다. 공개적 재판이 열리자, 피의자 대부분은 앞서 경찰과 검사정(檢事廷)에서 진술한 것은 고문에 의한 허위 진술이라며 ‘총독 모살미수’ 자체를 강하게 부인하였다. 그러나 1912년 9월 28일 1심 공판 선고 때 재판부는 123명의 기소자 가운데 105인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이때 오대영(吳大泳)·옥성빈(玉成彬)·서기풍(徐基渢)·길진형(吉鎭亨) 등 42명과 함께 5년 형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1913년 3월 경성복심법원 2심 공판 때 105인사건 주모자로 지목된 윤치호(尹致昊)·양기탁(梁起鐸)·임치정(林蚩正)·이승훈·안태국(安泰國)·유동열(柳東悅) 6인을 제외한 99인이 풀려날 때 함께 석방되었다. 출옥 후 간도로 건너가 1913년 10월 간도 룽징(龍井)에서 장석함·윤명희(尹命熙) 등과 함께 영신야소여학교(永信耶蘇女學校)를 설립하고 역사 교사를 거쳐 교감으로 재직하였다. 1918년 9월 용정촌 조선인거류민회 이사에 선임되었고, 1919년 1월에는 김신근(金信根) 등과 함께 룽징에서 기독교청년회를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달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간도 거주 한국인 대표자를 위한 기부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간도에서 출발해 국내 함흥에 잠입, 영생학교(永生學校) 관계자들과 연락하여 독립선언서 발표 후의 독립운동 방략 등을 협의한 후에 간도로 돌아왔다. 그 후 명동학교(明東學校)에서 비밀 모임을 하고 국내에서 고종 황제 인산일(因山日)을 기해서 독립선언이 있을 것을 전하며 독립선언서와 선언식순 등을 동지들에게 전달하였다. 본래 국내와 시간을 맞추어 거사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그해 3월 13일 국외 동포들만이라도 모여 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한족독립기성회(韓族獨立期成會)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의사부(議事部) 부원으로 선임되었다. 3월 26일 구춘선(具春先)·이봉우(李鳳雨)·고용환(高容煥)과 명동학교, 정동학교(正東學校) 학생 및 기독교 교도 등을 규합하여 간도 국자가(局子街)에서 독립선언 축하회를 주도하였다. 이때 중국 측 군경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구춘선 등과 함께 도윤공서(道尹公署)에 배상 책임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1919년 4월 체포되어 그해 9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1년 4월 동경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 문과에 특별학생으로 입학해 1925년 3월 졸업하였으며, 일본 유학 중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東京朝鮮基督敎靑年會) 이사로 활동하였다. 귀국하여 1925년 9월부터 1936년 4월까지 10여 년간 평양의 숭실중학교 교사(교무주임)로 재직하였다. 1931년 6월 평양한글연구회 위원, 1932년 5월에는 금주·단연·교풍(矯風)·저축 장려 등을 목적으로 조직된 조선기독교절제운동회(朝鮮基督敎節制運動會)의 회계원, 1933년 11월에는 이사로 활동하였다. 1937년 10월 신사참배 거부 문제로 북장로교에서 숭실중학교 및 숭실전문학교 등의 폐교원을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자 전국의 지방 유력자들과 함께 숭실학교의 후계 경영을 목적으로 숭전구교운동후원회(崇專救校運動後援會, 혹은 崇專存續會)를 조직하고 지방실행위원(함흥)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3월 평안농사주식회사 지배인, 1942년 1월부터는 취체역(取締役)을 지냈으며, 1940년 8월 ‘함본봉우(咸本鳳羽)·함본풍(咸本豊)’으로 창씨개명하였다. 광복 후 월남하여 전라남도 광주(光州) 서중학교(西中學校) 역사 교사를 거쳐 1950년 5월 순천공립중학교(順天公立中學校) 교장, 1952년 4월 광주 서중학교 교장, 1957년 2월부터 1961년까지 광주 숭일고등학교(崇一高等學校) 교장 등 말년을 교육자로서 활동하다가 1970년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윤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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