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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恩錫

恩錫

1905. 6. 6 ~ 1988. 3.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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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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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榮州)일본방면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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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0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05) 1905년 6월 6일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 풍기면(豊基面) 성내리(城內里)에서 태어났다. 창씨명은 금전은석(金田恩錫)이다. 1935년 7월 동아일보(東亞日報) 풍기지국의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1938년 11월 29일, 전시체제 하에서 이른바 ‘종교보국(宗敎報國)’을 위해 조직된 영주기독교회연합회(榮州基督敎會聯合會) 결성식에 참여하여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당일 결성식 종료 후에는 신도 300여 명과 함께 영주신사(榮州神社)에 참배하도록 당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기독교 목사로 활동하면서, 종교적 성격의 비합법 민족주의그룹을 결성해 포교라는 합법공간을 활용하여 신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8월 나고야(名古屋)의 기타교회(北敎會) 및 이치노미야교회(一宮敎會)에 담임목사로 부임한 후, 그 해 여름 나고야 인근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적 성향의 기독교 목사 등이 박상동(朴尙東) 목사를 중심으로 종교적인 민족주의그룹으로 결집될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1940년 8월부터 1941년 12월 일제 경찰에 붙잡힐 때까지 여러 차례 비밀회합을 갖고 운동상의 기본적 태도, 실천 활동으로 조선기독교를 이용하는 방법, 시사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 핵심 내용을 보면, 기독교 포교라는 합법 공간 이용, 전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과 자주자립 정신의 앙양, 최후에 전 조선민중이 봉기할 시기는 일본의 국력이 가장 피폐한 시기를 포착할 것 등이었다. 특히 신자들끼리 조선말을 사용해 일본화(日本化)를 막고, 신궁·신사(神宮神社)를 배격하고 그 참배를 거부하며, 여운형(呂運亨)을 추장(推獎)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것 등에 대해 논의하고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941년 12월 9일 박상동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혀서, 1942년 1월 17일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나고야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당시 일본 당국은 이 사건을 ‘조선기독교 목사 등의 민족주의 및 불령(不逞) 종교그룹 사건’으로 취급하여, 그 전국적 관련성을 고려해 대심원 검사국과도 상의하는 등 신중하게 처리한다면서 오랜 기간 기소를 유보하였다. 미결구류 상태로 계속 끌다가 결국 구류기간이 만료된 1942년 12월 30일 이후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귀국하여 경북 예천(醴川)에서 거주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경북 문경(聞慶)에서 문경교회(聞慶敎會)를 재건하고 문경에서 거주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교도소 선교’가 법제화되어 서울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에 형목(刑牧)이 정식으로 배치되었는데, 서울형무소 제3대 교무과장을 역임하였다. 1952년과 1956년에 문경에서 도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8년 11월에는 인천소년형무소 교무과장에 임명되는 등 1966년 6월 면직될 때까지 정부의 교회사(敎誨師)로 계속 활동하였다. 이후 인천소년형무소 전도목사로 활동하였으며, 1976년 8월 24일 용인(龍仁)의 낙원수양관에서 초교파적으로 교도소선교회(矯導所宣敎會)가 조직되었을 때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88년 3월 25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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