羅在瑗
在瑗1898. 12. 4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인국민회
- · 흥사단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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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15) 1898년 12월 4일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증산면(甑山面) 이안리(利安利)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유년시절의 행적과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1915년 당시 새크라맨트(Sacramento)에 거주하고 있었다. 가족관계를 살펴보면, 1929년 10월 19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로부터 온 김수산나와 혼인하고, 1932년 12월 19일 첫 딸을 출산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1915년 이후 미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와 흥사단(興士團)에서 활동하였다. 1917년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 있는 공립소학교에서 수학하면서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 지방회 서기로, 1918년에는 재무원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6월 로스앤젤레스 지방회가 개최한 ‘한인 친목을 쌓고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강화한다’는 취지의 모임에서 「하고자 하면 능히 할 수 있다!」라는 웅변으로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1919년 1월 2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인접원으로 홍언(洪焉)·한승곤(韓承坤)·이혜주 등과 총회장·부회장 취임식 행사를 주관하였다. 1919년 9월 박제목·김대위·조영호·이영만·이운경(李雲卿) 등과 대한인국민회 코스모폴리스(Cosmopolis) 지방회 설립청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1923년 오리건주(State of Oregon) 소재 태평양대학교(Pacific University)에 예과에 입학하여 수학하였다. 1928년 3월 시카고(Chicago)로 이주한 후,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 총무로 활동하면서 재정 확충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1930년 2월에는 시카고 지방회 회장으로 대한인국민회 창립기념식을 주관하였고 4월에는 3·1운동 기념금 모집 논의를 주도하였다. 이와 함께 이복원·윤임과 함께 시카고 대한인공동회 존속 문제를 논의하였다. 대한인공동회는 1930년 2월 광주학생운동을 지원 선전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시카고 지역에서 조직된 단체였다. 1930년 11월에는 강영소(姜永韶)·변준호(卞俊鎬)와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 시카고지국을 설치하여 중국 등지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였다. 1934년 8월 흥사단에 입단(제269단우)하고, 9월 대한인국민회 시카고 지방회 재무원으로 활동하며 의무금과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힘을 기울였다. 그 해 11월 지방회 대의원 자격으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부회장 선거에 참여하였다. 이어 1935년 대한인국민회 대의원으로 3·1운동 기념식과 국치기념식 등의 행사를 주관하였다. 1936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시카고 지방회 대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회장제가 집행위원장과 위원제로 변경됨에 따라 1938년 실업위원, 1939년 총무위원, 1940년 재무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이후 대한인국민회 시카고 지방회 집행위원장 임초(林超)를 대리하여 지방회를 이끌며, 국치기념식 등의 주요 행사를 진행하였다. 1942년 9월에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성립축하 기념식에서 독립전쟁론을 역설하며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에 대한 의식을 환기시켰다. 1943년부터 1944년까지 대한인국민회 시카고 지방회 총무로 활동하며 동포 사회의 권익 보호와 독립운동 의식 환기에 힘을 기울였다. 1915년부터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대한인국민회 지방회 운영경비와 국민의무금,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 (臨時政府) 후원금, 한국광복군 후원금 등의 명목으로 360여 달러에 이르는 금액을 헌금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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