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균
金鴻勻1881. 4. 18 ~ 1927. 10. 30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 · 북미지방총회
- · 새크라멘토 지방회
- ·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포상 정보
- · 애족장(201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5) 1881년 4월 18일 평안남도 개천군(价川郡) 내남면(內南面) 용천리(龍泉里)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이명으로 김채훈(金采勛)과 김홍균(金洪均)을 사용하였다. 1904년 5월 하와이(Hawaii)로 노동 이민을 갔고, 1905년 4월 미주 본토로 이주하여 새크라멘토(朔都, Sacramento)에 정착하였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에서 활동하면서, 김채훈이라는 본명을 김홍균으로 개명하였다. 이는 대동보국회 관여자들이 의형제를 맺으며 이름의 중간에 홍(鴻)을 넣어 개명한 것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10년 2월 10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새크라멘토 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1년 12월에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 재정부문 조사위원으로 선임되었지만, 신병으로 사임하였다. 1911년 중국의 신해혁명 지원을 목적으로 1912년 1월 이병호(李秉湖)·서필순·황사용(黃思溶) 등과 ‘중국혁명 군비 보조’ 모금운동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13년에는 제10단우로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하였으며, 평안도 대표로 흥사단 발기 창립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또 1913년 8월 24일 국내에서 사진신부로 온 김석은과 결혼하였는데, 양주은·김병규와 합동결혼식을 가졌다. 1915년 대한인국민회 새크라멘토 지방회에서 대한인국민회 의무금 수봉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916년 2월에는 새크라멘토 지방회 총무로 선임되었다. 1917년 회장에 선임되었고, 1919년에는 학무원으로 한인 2세대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1917년부터 콩농사를 비롯한 대규모 농업경영으로 일시 성공하였으나, 1920년 전후 기후문제로 실패하였다. 1919년 1월 새크라멘토 지방회 대표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임시국민대회에 참석하였다. 그 해 4월 15일 새크라멘토 지방 한인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지를 맹세하였다. 1920년 3월 12일 「독립운동과 재미한인의 책임」이라는 글을 『신한민보』에 기고하여, 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외교활동 지지와 독립운동 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청년들에 대한 지원을 주장하였다. 이어 1920년 4월 8일 개최된 대한인국민회의 재미국민대회 임시평의회에서 한인사회 운영과 독립운동 지원 방안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새크라멘토 지방회 총무와 법무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샌프란시스코(桑港, San Francisco) 로 이주한 이후, 1923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구제원,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실업부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법무원을 역임하였다. 1926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총회 총무로 선출되어 활동 중, 1927년 10월 30일 급성 심장병으로 사망하였다. 1912년 11월 4일부터 1924년 3월까지 국민의무금과 자유공채, 전시저축표, 적십자 와 독립의연금, 국민대표회 대표원 경비지원금, 외무국 연금, 3·1운동 기념금을 지원하고, 신한민보사 지원금 등의 명목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박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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