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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鉉九

鉉九

1891. 6. 27 ~ 1967.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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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金鉉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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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沃川)미주방면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옥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헤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
  • · 한인학생동맹
  • ·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 · 대한인국민회
  • · 구미위원부
  • · 하와이 대한인교민단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관련 사건

  • · 필라델피아 ‘제1차 한인회의’
  • · 동지미포대표회
  • · 해외한족대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1891년 6월 27일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에서 아버지 김기만(金基萬)과 어머니 연일(延日) 정씨(鄭氏)의 2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판도판서공파(板圖判書公派) 20세손이다. 미국에서는 Henry Cu Kim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이종사촌 김규흥(金奎興)을 통해 근대 학문에 접하였다. 김규흥은 창명학교(彰明學校)를 설립하였고,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에서 활동한 인물이었다. 1906년 서울 계산보흥학교(桂山普興學校)에 입학해 교사 유근(柳瑾)·원영의(元泳義)의 지도를 받았다. 유근과 원영의는 당시 김규흥과 함께 대한자강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원영의의 조언으로 보성학교(普成學校, 현 보성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김규흥을 따라 중국 유학을 꿈꾸었으나 그가 일제 경찰에 붙잡히자 중국행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어 1907년 헤이그특사 사건이 발발하자 신학문을 수용하고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1908년 가을부터 김규성(金圭成)·홍승국(洪承國)·송진헌(宋晉憲)과 함께 유학 준비를 시작하였다. 유학 준비 과정에서 김규성이 상하이(上海)로 돌아가게 되자, 홍승국·송진헌과 함께 원산(元山)-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시베리아(Siberia)를 경유하여 뉴욕(New York)에 이르는 유학길에 올랐다. 여정 중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순만(鄭淳萬)으로부터 여비를 도움 받았고, 미국 콜로라도(Colorado) 주 덴버(Denver)에서 활동 중인 박용만(朴容萬)을 소개받았다. 1904년 4월 미국 뉴욕에 도착한 후, 박용만을 찾아 덴버로 갔으나 그는 네브래스카(Nebraska)로 떠난 뒤였다. 박용만을 찾아가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자 윤병구(尹炳求)의 도움으로 와이오밍(Wyoming)주에서 4개월 간 철도노동자로 일하였다. 자금이 마련되자, 1909년 가을 네브래스카(Nebraska)로 가서 박용만이 링컨(Lincoln) 시에서 운영하던 한인 학생기숙사에 머물며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하였다. 1910년부터 1913년까지 헤이스팅스(Hastings)대학 예비과에서 대학교 진학 준비를 하면서, 박용만이 설립한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의 학생들에게 한글과 문법을 가르쳤다. 이어 박용만이 설립한 네브래스카 대한인거류민회(大韓人居留民會)에 가입하였고, 이때 제1회 단장을 역임하며 박처후(朴處厚)·백일규(白一圭)·홍승국·정태은 등과 활동하였다. 1913년 헤스팅스 대학교 예비과를 졸업한 후, 그 해 9월 뉴욕주에 있는 코넬대학교(Cornell University)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경제적인 문제로 인하여 1년 반 만에 그만두고, 1914년 오하이오주립대학교(The Ohio State University)에 입학하였다. 이때 학업을 이어나가는 동시에 소년병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한인학생동맹회(Korean Student`s Alliance)’에 참여하였다. 한인학생동맹회는 1913년 6월 4일 한인학생 대표들이 모여 네브라스카(Nebraska)주 링컨(Lincoln)시에서 결성한 단체로, 1년에 2차례 영문 잡지를 발간하며 외교 선전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기여할 것을 목표로 하였다. 1914년 6월 1일 미주 한인사회 최초의 영문 잡지로 한인학생동맹회가 창간한 『한인학생평론(The Korean Student`s Review)』의 기자로 참여하였다. 1917년 6월 오하이오주립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1918년 12월 30일, 오하이오주 콜럼버스(Columbus)에서 결성한 ‘북미한인학생연맹(The Korean Student`s League of America)’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문제를 알리고 한국에 대한 동정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월간 영문 잡지를 창간할 때, 박진섭(朴晉燮)과 함께 참여하여 기자 겸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창간호로 『일본 지배하 한국의 자유와 평화? (Freedom and Peace with Korea under Japan?)』를, 4월에는 『지속적인 극동의 문제: 한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A Persistent Problem of the Far East: What Shall become of Korea?)』, 5월에는 『Young Korea(젊은 한국)』를 발행하였다. 1919년 7월 2일 이살음(李薩音)의 후임으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북미지방총회에서 발행하는 『신한민보(新韓民報)』의 편집인으로 초빙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서재필(徐載弼)이 이승만(李承晩), 정한경(鄭翰景)과 함께 필라델피아(Philladelphia)에서 개최한 ‘제1차 한인회의’(일명 ‘대한인총대표회의’)에 참가하여, 유일한(柳一韓)·조안 우(Joan Woo)와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을 기초하고, 10개조의 결의문을 작성하였다. 이는 민주공화국의 기본 원리를 담은 건국의 청사진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에 중요한 좌표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신한민보』의 편집인으로 1919년 7월 24일자에 쓴 「독립과 통일」 논설을 시작으로 많은 논설과 기고문을 통해 한인 사회가 보다 민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네브래스카의 한인학생동맹과 오하이오의 북미한인학생연맹에서 활동한 경험으로 1919년 9월 26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한인학생공동회’를 개최하였다. 미주 전체의 한인 학생 통합조직을 만들기 위해 학생연합회발기 예비임시통신위원회를 만들어 위원장이 되었다. 또 시카고(Chicago)에서 곽림대(郭林臨大)를 중심으로 발기한 ‘미주한인유학생회’와 통합단체를 만들기로 결의하고, 임시회장에 선임되었지만, 1921년 4월 30일 결성된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 회장에는 이용직(李容稷), 부회장에 조병옥(趙炳玉)이 당선되었다. 이와 함께 대한인국민회 활동도 전개해 나갔다. 1920년 대한인국민회 샌프란시스코 지방회 학무원에 선임되었고, 1920년 4월 8일부터 10일까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주관한 재미국민대회에 평의원으로 참가하였다. 1921년에는 북미지방총회 학무원, 1922년에는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이자 대의원회를 대표하는 대의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1년 3월부터는 백일규·강영승(康永昇)과 신한민보 명예기자로 활동하였다. 1921년 8월에는 ‘미주 한인사회 대표’ 자격의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경비 부족으로 상하이(上海)에 가지 못하였다. 1922년 1월 캘리포니아대학교(UC버클리대) 철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는 한편, 8월 20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학생친목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4월 각 분야의 전문지식을 공유하여 재미 한인사회에 새로운 문화운동을 펼치자는 취지로 홍언(洪焉)·백일규·강영승·강창준 등과 이문회(以文會)를 발기했으나 활동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폐지령을 내리고, 이승만의 대통령직을 면직한 직후인 1926년 9월 이승만의 요청으로 구미위원부 위원이 되었다. 이후 국내와의 연계를 도모하기 위해 신간회(新幹會) 미주지회 설치를 추진했으나, 이승만의 반대로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1929년 10월 하와이로 건너가 대한인교민단의 서기 겸 재무,『국민보(國民報)』 주필을 맡았고, 호놀룰루(Honolulu) 동지회(同志會) 지방회장, 『태평양잡지』 편집인, 동지회 중앙이사부 이사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7월 15일부터 21일까지 호놀룰루에서 열린 동지회미포대표회(同志會美布代表會) 이후 이승만의 독선적인 활동에 실망하여, 1930년 8월 26일자로 『국민보』 주필직과 교민단 재무와 서기직 사직을 공개 발표하였다. 이 일로 하와이 한인사회는 대한인교민단과 이승만을 지지하는 동지회 간의 갈등과 법정 소송으로 이어졌다. 1931년 10월 25일 대한인교민단 산하의 대한인홍보부 서기를 맡아, 10월 28일자로 후버(Hernert Clark Hoover) 미국 대통령에게, 11월 2일자로 국제연맹의회 의장 아리스티드 브리앙(Aristide Briand)에게, 12월 11일자로 중국 국민당정부의 린썬(林森)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1932년 11월 14일에는 국제연맹 사무총장 에릭 드럼몬드(Eric Drummond)에게 공한을 보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1933년 2월 1일 하와이교민단을 해소하고 대한인국민회를 부활하면서 서기 겸 재무, 『국민보』 주필을 맡아 1934년까지 활동하였다. 이후 1937년 1월부터 1945년 1월까지 주필 겸 편집인으로, 이어서 1951년 2월부터 1952년 1월까지는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17일 하와이 대한인국민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 활동 지원을 목적으로 조직한 찬무회에 박상하(朴相夏)·김진호·정봉관(鄭鳳觀)과 함께 기밀부원으로 참여하였다. 1940년 10월 13일 하와이의 6개 한인단체 대표들이 결성한 연합한인위원회의 관리부 부의장과 조사부 의장에 선임되었다. 1941년 4월 19일부터 29일까지 호놀룰루에서 미주(美洲) 9개 주요 단체 대표들이 개최한 해외한족대회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가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와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를 설립하였다. 1941년 5월 4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방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1951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으로 활동했고 1962년 한국을 방문하였다. 1967년 8월 14일 호놀룰루에서 사망하였다. 『김현구 자서전』, 『우남(雩南)이승만 약전(略傳)』, 『우성(又醒 박용만 유전(遺傳)』, 『검은(儉隱) 정순만 유전(遺傳)』, 『옥계(玉溪) 김홍기 약전(略傳)』등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홍선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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