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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학

金鍾鶴

1878. 3. 17 ~ 1961.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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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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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달성(達城)미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달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 · 목골리아지방회
  • · 하와이 한인청년회
  • · 가주 스탁톤 경찰소
  • · 삭도지방회
  • · 나성지방회
  • · 델라노지방회
  • · 국민대표대회
  • · 대조선국민군단
  • · 흥사단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6)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16) 1878년 3월 17일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달성군 옥포면(玉浦面) 금흥리(金興里)이다. 이명으로 김종학(金鍾學)을 사용하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등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1904년 9월 16일 28세 때 갤릭(Gaelic)호를 타고 하와이(Hawaii) 호놀룰루(Honolulu)로 노동이민을 갔다. 1910년 7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오아후(Oahu) 목골리아지방회에서 회장 김난수, 부회장 겸 총무 송기황, 서기 서병순, 재무 유진간, 학무원 안재덕(安載德), 법무원 김천호, 구제원 이극호 등과 함께 대의원으로 선정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1년에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 부회장이 되어 회장 정칠래(鄭七來), 총무 손창희, 서기 홍인표, 재무 박원걸(朴元杰)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어 1912년에 하와이지방총회에서 재무원으로 선정되어 부회장 노재호, 총무 박상하(朴相夏), 학무원 김관묵, 법무원 안원규(安元奎), 구제원 김익성, 외교원 홍치범 등과 함께 지방회 건전한 재정 운영과 독립운동 자금 수합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하와이지방총회 대의원 의장으로, 각 지방의 대의원들과 함께 지방회 운영과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고민하였다. 1914년에는 박상하를 대신하여 하와이지방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5월 이승만(李承晩)·박용만(朴容萬)·이내수·홍한식(洪翰植)·안원규·한재명(韓在明) 등과 함께 한인청년회를 조직하여, 한인 청년들을 독립운동과 항일전선으로 참여시키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15년에도 하와이지방총회 회장으로 활동하였으나, 대한인국민회를 장악하고자 하던 이승만 세력이 공금횡령 의혹을 제기해 붙잡혔다. 이에 무죄로 석방된 뒤 울분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승만과 박용만 간의 권력 투쟁에 환멸을 느껴 1916년 8월 9일 롤린선편을 타고 하와이에서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로 이동하였다. 1917년 9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北美地方總會) 다뉴바(Dinuba)지방회 회원으로 러시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이갑(李甲) 서거를 추도하기 위한 행사를 개최하고 추도사를 낭독하여 행사에 참가한 한인들의 항일정신과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이후 1919년 3월, 한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맨티카(Menteca), 스탁톤(Stockton), 튜레시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합동으로 이를 경축하기 위한 행사를 주관했으며, 일본의 만행과 독립운동 참여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 해 6월부터 1922년까지 방사겸(方四兼)과 함께 스탁톤경찰소에서 파출위원, 경찰부장으로 선정되어 한인들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1923년에는 맥스웰(Maxwell)지방회에서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대한인국민회 창립, 3·1운동, 국치기념식 등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의 열기를 고조시키는데 앞장섰다. 1924년에는 삭도지방회(朔都地方會, Sacramento)에서 부회장 박성재, 서기 우병옥, 재무 박양래(朴養來), 학무원 신영일(申永一), 총무 진영규(陳永奎), 대의원 이옥형 등과 함께 법무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에도 같은 지방회에서 부회장 이재수(李在洙), 서기 한재명(韓在明), 학무원 황성국, 법무원 송오균(宋五均), 대의원 이석원 등과 함께 총무로 선정되어 지방회의 건전한 재정과 독립운동 자금 수합에 힘을 쏟았다. 이후 1936년 5월 13일, 흥사단(興士團)에 제285단우로 입단하였다. 1936년 5월 17일 김호(金乎)·이살음(李薩音)·송헌주(宋憲澍) 등 미주한인 지도자들이 모여서 침체되어 있던 북미 대한인국민회 활동을 부흥하고자 원탁회의를 개최했으며, 여기서 기존의 회장 제도를 변경하여 집행위원장과 각 위원제도를 도입하였다. 그 결과 미국 본토, 하와이, 멕시코, 쿠바 각지방회도 제도를 변경하였다. 위원제도가 자리 잡은 1941년부터 델라노(Delano)지방회에서 활동하며,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43년에는 통신원과 교육위원으로 선정되어 한인 2세들이 한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고 민족의식 강화를 통해서 독립운동 전선에 참여할 수 있도록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1944년에는 같은 지방회에서 집행위원장 박충섭, 서기 조울림, 교육위원 윤응호, 실업위원 이진섭, 선전위원 오관선 등과 함께 총무로 활동하였다. 11월 17일 순국선열기념식을 주최하여 독립을 보지 못하고 서거한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1945년에는 대표원으로 선정되어 대한인국민회 대표대회,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에 참가하였다. 1917년부터 1945년까지 국민의무금, 독립운동의연금,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금 등 다양한 명목으로 총 593원 50전을 제공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그리고 미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지속적으로 재정적인 기반을 제공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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