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배
金潤培미상 ~ 미상
관련 단체
- · 대조선독립단
- · 대한민족통일촉성회
- · 한인협회
- · 대한인국민회
- · 한인상업회
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7)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7) 출신지는 미상이다. 이명으로 김윤배(金允倍)를 사용하였다. 도미한 시기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활동 당시 하와이에 거주하였다. 1913년 12월 대한인국민회 오하우 호놀룰루지방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1914년까지 국민보사 인쇄부에 근무하는 등, 1910~1940년대 하와이 한인사회의 유지 인사로 활발히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박용만(朴容萬)의 주도로 설립한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 독립단) 단원으로 군자금과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였다. 1920년대는 하와이 한인사회가 이승만(李承晩)파와 박용만파로 분열되어 다툼과 혼란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 파의 투쟁으로 부상자와 피구인자(被狗引者)가 발생하자 1921년 8월 2일 「조선인의 쟁투와 이승만의 불인망」 이라는 글을 작성하여 국내와 해외 각 처에 배포하였다. 1923년에는 대조선독립단 단장으로 동양척식회사의 차관문제에 대한 항의서를 뉴욕 은행에 보내는 등 해외 곳곳에 민족독립 염원을 보여주었다. 1920년대 후반기까지 대조선독립단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통일노선을 만드는 것이 시급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1928년 대한민족통일촉성회(大韓民族統一促成會, 촉성회)를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독립단, 교민단(僑民團), 중립자 측으로 구성된 촉성회의 선전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하와이 한인사회의 통일적 독립운동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독립운동의 촉진을 위해 독립운동의 방향을 임시정부에 집중시키고자 1930년 한인협회(韓人協會)를 결성, 재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기관지로 『한인협회공보(韓人協會公報)』를 발간하였다. 1931년 호항(호놀룰루, Honolulu)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시국문제에 대하여 웅변하고, 4월에는 독립단 하와이지부 총부단장 취임식 사회를 맡는 등 지역 인사로서 한인행사에 참여하였다. 또한 이 시기 한인들의 모일 수 있는 하나의 장(場)이었던 한인교회의 문제에도 적극 개입하여 한인사회의 불화와 분열을 조정하는데 대표자로서 앞장섰다. 1931년 5월 1일 한인교회에 문제를 일으킨 이용직 목사에게 서한을 보내어 이 목사의 그릇된 행동을 지적하며 충고하기도 하였다. 1934년 당시 하와이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국민회) 총회장이었던 이정건(李正健) 및 여러 임원들이 경제난으로 사퇴하자 그 해 6월 15일 이정건의 후임으로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국민회 총회장으로 국민회와 독립단의 합동운동에 노력을 기하며 하와이 한인의 장래와 민족운동 결집에 힘썼다. 같은 해 8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재무부 주미제5행서(駐美第五行署) 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35년과 1936년 하와이 국민회 총선거에서 참의원으로, 1937년 1월 21일 하와이 국민회 학무부원으로 당선되었다. 1940년대에는 한인상업회(韓人商業會)를 조직하였으며 호상금, 유지금, 특연 등으로 한인사회 여러 곳에 도움을 주었다. 1945년 8월 17일, 광복을 맞은 직후 사망하여 8월 20일 하와이 국민회관에서 장례를 치루고 다이아몬드 묘지에 안장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하희⋮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