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元容
元容1896. 12. 26 ~ 197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하와이교민단
- · 대한인국민회
- · 대한인동지회
- ·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1896년 12월 2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미국에서는 워렌 킴(Warren Kim)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유학을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上海)를 거쳐, 1917년 5월 8일 미국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도착하였다. 미국에 도착한 이후 콜로라도(State of Colorado)주 푸에블로(Pueblo) 지방에 정착하였다. 이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와 주미외교위원회(駐美外交委員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7년 8월 29일 국치기념식에서 ‘8년의 원통한 말’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다. 당시 푸에블로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1918년 4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푸에블로지방회 설립 청원서를 제출하여,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로부터 설립 인준을 받았다. 푸에블로지방회가 설립 인준을 허가받은 같은 해 12월 푸에블로지방회 재무로 선임되었다. 이후 오하이오(State of Ohio)주 애크론(Akron)으로 이주하여 1919년 1월 오하이오지방회 설립을 추진하였고, 같은 해 6월 오하이오지방회 총무로 선임되었다. 1924년 1월 대한인국민회 시카고(Chicago)지방회 총무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9월 21일 설립된 동지회(同志會) 시카고지회 외사부 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7월 15일부터 21일까지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에서 개최된 ‘동지회 미포대표회(同志會美布代表會)’에 시카고 대표로 참석하여 상무원(서기 겸 재무)에 선임되었다. 이때 총재에 이승만(李承晩), 이사장에 이용직(李容稷), 중앙부장 겸 『태평양잡지(太平洋雜誌)』 주필에 김현구(金鉉九)가 선출되었다. 이 대회 이후 김현구·이용직과 함께 이승만과 대척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다. 1932년 초 하와이교민단에서는 선전부를 설치하였는데, 이때 김현구·이용직과 함께 비서에 임명되었다. 1933년 1월 3일, 하와이교민단 대의회에서 이를 해체하고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로의 복귀를 결정하면서 법무담당에 선임되었다. 1934년에 들어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재정난으로 기관지인 『국민보(國民報)』 식자(植字) 인력에게 봉급조차 줄 수 없게 되자, 주필 김현구와 함께 사무를 맡아 처리하였다.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8월 27일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를 후원하기 위해 찬무부(贊務部)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정두옥(鄭斗玉)·한길수(韓吉洙)·홍한걸과 함께 찬무부 산하 선전부원에 임명되었다. 1941년 4월 19일부터 5월 1일까지 미국 본토와 하와이·멕시코·쿠바 지역의 9개 단체 대표들이 호놀룰루에 모여 개최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에 안원규(安元奎)·김현구와 함께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여기서 5월 4일 결성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영문서기에 선출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駐美外交委員部)의 대미 외교활동 활성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원순(李元淳)과 함께 워싱턴(Washington D.C.)에 파견되었다. 1943년 12월 23일 워싱턴사무소 개설 등의 문제로 동지회가 탈퇴하고, 1944년 6월 10일 워싱턴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이때 선전부장 전경무(田耕武)와 함께 외교 사무를 관장하였다. 1944년 5월에는 하와이 의사부에서 집행서기에 선출되었고, 같은 해 11월 재미한족연합회 전체대표회의에서 주미외교위원부를 재조직하였는데, 이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충칭(重慶)의 임시정부에서 동지회 대표가 선출되지 않은 주미외교위원부의 조직을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하였다. 이에 위원장 이승만, 부위원장 김원용, 총서기 정한경(鄭翰景), 위원 한시대(韓始大)·김호(金乎)·이살음(李薩音)·변준호(卞俊鎬)·안원규(安元奎)·송헌주(宋憲澍)를 선임하였다. 1945년 4월 말부터 샌프란시스코회의가 열리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1인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1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 24일, 하와이 의사부 국내 파견대표 가운데 1인으로 선임되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국내파견 대표단’을 이끌고 제1차로 1945년 11월 4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 2월 12일 도착한 제2차 대표단과 국내활동을 벌였다. 이때 한시대·김호와 함께 국내에서 좌우를 아우르는 중간세력 결집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1946년 9월 15일 통합대회를 열어 신진당(新進黨)을 창당하였는데 통합대회의 사회를 진행하였고 김호는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하와이로 돌아갔다가 미 군정청 민정장관에 발탁된 안재홍(安在鴻)의 후임으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에 선출되어 1947년 2월 10일 다시 귀국하였다. 김호와 함께 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중간파 세력 결집을 통한 정당 통합과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47년 10월 민주독립당(民主獨立黨) 공동의장에 선임되었고, 중간파 정당의 협의체인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으로도 선출되었으나, 1948년 1월 24일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갔다. 1959년 미주지역 독립운동사를 정리한 『재미한인50년사』를 저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도형⋮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