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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철

朴景喆

1885. 3. 14 ~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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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박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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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서울특별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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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간민회
  • · 국민회
  • · 대한독립(의용)군
  • · 고려노농군회
  • · 한인사회당 연해주총회
  • · 고려혁명군(제2본대)

포상 정보

  • · 애국장(201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3) 1885년 3월 14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박경철(朴景哲·朴京喆) 사용하였다. 북간도와 연해주 지역에서 교육운동과 무장투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서울의 상동청년학원을 졸업하였으며, 수리(數理)에 정통하고 중국사와 한어(漢語)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국권피탈 이후 북간도와 하얼빈(哈爾濱)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도미(渡美) 자금을 마련하고자 어업노동에 종사하다가, 1913년경부터 북간도에서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6년 당시 명동중학교의 학감 겸 교사로 재직하였다. 1913년에 조직된 간민회(墾民會)에 참여하여, 1914년 2월 4일 옌지분회(延吉分會) 재무로 선출되었다. 그 해 8월 29일 이승교(李承橋)·장기영(張基永) 등 8명과 국치기념일 행사를 발기하였다. 비밀결사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에 가입하였으며, 명동학교 교사 재직 시에는 교장 김약연(金躍淵)이 사는 북간도 용암촌(龍巖村)에 거주하였다. 1919년 3월 13일에 일어난 북간도 만세운동에서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연해주 니콜스크(Никольск, 현 우수리스크)에서 독립운동단체 대표자 회의인 ‘노중령(露中領)동지 대표자회의’ 개최 연락을 받고, 2월 초순부터 3월초까지 북간도지역 대표 선정, 기부금 모집, 독립선언과 시위운동 등 만세운동 준비를 위한 수차례의 비밀회의에 참여하였다. 북간도 만세운동을 이끈 ‘간도 독립선언운동원 간부진’의 재무부 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 신한촌(新韓村)으로 이주하였다. 1919년 6월말 서울 종로 시위 때 구속된 3명의 노인단(老人團) 단원 가족 구제 방안 등을 논의할 ‘동지회’에 신한촌 대표로 선출되었다. 1919년 11월경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의 파견으로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참모에 임명되었다. 1919년 12월 대한독립군 대장 홍범도, 참모 이병채(李秉埰)와 3인 명의로「유고문(諭告文)」을 발표하여 항일무장투쟁 노선을 천명하였다. 100여 명의 대원들을 이끌고 북간도로 이동했는데, 대한국민회를 대표하여 대한독립군에 참여한 만큼 대한국민회에서의 위상이 높았다. 총회장 구춘선(具春先), 부총회장 서상룡(徐相龍)과 함께 군자금 및 독립군 모집을 위한 ‘권유포고문’, 옌지도윤(延吉都尹)에게 보내는 청원서 등의 문건에 연서하였다. 1920년 4월 대한국민회에서 러시아령으로 파견되었고, 5월 15일 개최된 국민회 지방대표자회의에서 유찬희(柳讚熙)·김영학(金永學) 등 5명과 총기구입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0년 5월 19일 대한국민회, 최진동(崔振東)의 대한도독부(大韓都督府) 그리고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결성된 대한군무독군부(大韓軍務督軍府)의 참모부 부장(副長)으로 선임되었다. 훈춘구역으로 이동하여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군사부에서 한경세(韓京世)·신우여(申禹汝)·고상준(高尙俊)·이승조 등과 활동하였다. 1920년 11월 일본군의 압박을 피해 이승조·고상준 등과 신민단 병력을 이끌고 연해주 내륙지방인 다우비허 지역(Anuchino, 현 아누치노)으로 이동했다. 수청(水靑)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창걸(韓昌傑) 군대와 수청 수주하(蘇子河) 흥두동(興頭洞, 흥두거우)로 이동하여, 통합군대인 고려노농군회(제1수청의병대)를 조직하고 참모장으로 활약했다. 1921년 5월 고려노농군회가 혈성단과 통합하여 연해주고려인통일의용대(제2수청의병대)를 조직하고 그 정치조직으로 한인사회당 연해주총회를 조직할 때 선전부장에 선임되었다. 한인사회당 연해주총회는 4개월 동안 유지되었으나 아누치노에 주둔한 러시아빨치산군대에 통합하라는 러시아연해주 군정의회의 명령으로 활동이 정지되었다. 1921년 10월 수청의용대의 참모장으로 한창걸 임시사령관과 함께 부대를 지휘하였다. 이때 수청의용대에서 일부 차출된 신용걸(申用傑) 중대 78명이 올가항에서 백군과 제1차 올가항전투를 벌였다. 1922년 4월 연해주혁명군정의회의 명령으로 한창걸과 함께 2개 중대를 이끌고 올가항을 공격한 제2차 올가항전투에서 백군을 몰아냈다. 이 시기 수청의용대가 러시아 백위파(白衛派)를 상대로 승리한 주요 전투는 1922년 7월 새영전투, 1922년 9월 야리채텐전투 등이다. 한창걸 군대(고려혁명군 제2본대)는 원동해방전쟁의 최후전투로서 1922년 10월 이바놉카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었고, 스파스크(현 스파스크달니) 공략과 니콜스크 해방전투에 참여했던 우수리철도 모나스트리세역(驛)에서 라즈돌리노예역까지 행군하였다. 1922년 11월 10일 원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우보레비치(Uborevich)의 명령으로 무장을 해제하였다. 무장 해제 당시 고려혁명군 제1대대장으로 수청 신영동에 근거를 둔 수청의병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시베리아 내전이 종결된 이후 슈코토보(Shkotovo, 침허우) 지역에 농지를 배정받고, 군대재산으로 ‘크라스나야 즈베즈다(붉은별)’이라는 아르쩰(집단농장)을 조직하였다. 1923년 1~6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고려제1군사령부 대표로 참석하였고, 국민대표회의 선언서에 서명한 대표 125명 중 한 사람이었다.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 39명에 소속되어 새로운 헌법 초안 수정위원, 국민위원회 후보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925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 제32호 중학교에서 화학·물리학 교사로 근무하였다. 1930년 9월부터는 블라디보스토크 제8호 공장학교로 옮겨 물리학을 가르쳤다. 1931년 9월 고려사범대학 자연과학부에 입학하였는데, 수청의용대 활동 경력으로 높은 급의 장학금을 받았다. 1937년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 당하여 1937년 말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주 중(中)치르치크 제23호 중학교에서 화학과 생물을 가르쳤다. 1939년 7월 교육 과정에서 한글 사용이 금지되자 교사직에서 물러났다. 1939년부터 중치르치크 ‘노•푸치(새길)’집단농장의 정원사로 1950년까지 근무하였다. 연금수령 자격이 주어진 60세 이후에도 생계유지를 위해 일을 계속하였다. 스탈린 사후 빨치산 활동자에 대한 개인연금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마음에서 우러나서 빨치산군대에 참여하고 조직했던 것이지, 연금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라며, 연금을 신청하지 않았다. 1967년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반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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