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종
朴慶鍾1875. 7. 22 ~ 1938. 4. 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광업사
- · 경학사
- · 서로군정서
- · 한족노동당
- · 고려혁명당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4년 8월 박경종 등의 군자금 모집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75년 7월 22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축산면(丑山面) 도곡동(陶谷洞)에서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의 11대손 박재명(朴載明)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무안(務安)이며, 본명은 우종(禹鍾)이다. 자는 응낙(應洛)이고, 호는 만성(晩醒)이다. 백부 박재우(朴載佑)의 양자이며,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매부(妹夫)이다. 1896년 결성된 영해 의병부대에 참가하여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으로 중군(中軍)을 역임한 아버지 박재명, 도서기(都書記) 박재희(朴載禧), 영병장(領兵將) 박동진(朴東鎭) 등과 함께 도총종사(都摠從事)를 맡아 군기(軍器)와 군량(軍糧)을 조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때 아버지 박재명은 총상을 입었고, 영병장 박동진은 전사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기에 이상룡이 거창(居昌)의 은표(隱豹) 차성충(車晟忠)과 가야산(伽倻山)에 의병기지(義兵基地)를 세우고 의병 활동을 펼치고자 할 때, 이상룡과 함께 1만 5천 금을 마련하여 보내기도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한편, 울진의 주진수(朱鎭洙) 등과 함께 학교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신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12월 말 이상룡·김대락(金大洛) 등이 중국으로 망명한 뒤, 곧이어 주진수의 권유로 1911년 1월 가족을 동반하고 서간도로 건너갔다. 이때 영해 출신의 박건(朴健)·박의열(朴義烈)·박의훈(朴義熏)·박치도(朴致道)·이형국(李衡國) 등이 함께 망명하였다. 1911년 루허현(柳河縣) 싼위안바오(三源浦)에서 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상룡·김대락 등과 함께 신학문 보급을 목적으로 하는 광업사(廣業社)를 설립하였으며, 대사탄(大沙灘)에 토지를 구입하여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1912년 8월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여 교민들의 생활 안정과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여관을 경영하며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1913년 8월 국내로 잠입하여 신의주의 황종언(黃鍾彦), 충남 공주의 정해일(鄭海日)·이승연(李昇淵) 등을 만나 독립군 양성과 독립군자금 모집을 논의하였다. 대구에서 안동의 이승화(李承和), 영양의 이형국(李衡國)·이헌교(李憲敎) 등 수십 명의 동지들을 만나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여 군자금 2만 7천원을 모집하여 만주로 귀환하였다. 그 뒤 이형국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여 충남 공주와 경북 대구 등지에서 동지를 모집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 경찰에 붙잡혀 1915년 9월 20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법원에서 징역 7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이상룡·김대락 등과 함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여하였으며, 1920년 10월 경신참변 이후 북만주로 이거하여 아청현(阿城縣) 프자텐(傳家甸)에서 농업공사(農業公社)를 경영하였다. 1924년 8월 판스시엔(盤石縣)에서 개최된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 창립대회에 참여하였다. 중앙의사위원회 위원장 김응섭(金應燮)을 비롯하여 이광민(李光民) 등이 주도하는 한족노동당의 중앙의사위원(中央議事委員)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8월에는 아청현(牙城縣) 주위안창(聚源昶)에서 개최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세포연합대회(細胞聯合大會)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8년 1월 귀국한 뒤, 4월 6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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