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원
金泰源1903 ~ 1926. 12. 2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단
- · 대한광복군사령부
- · 벽창의용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의주면(義州面) 서부동(西部洞)에서 출신으로, 재판을 받을 당시의 나이가 24세였던 것으로 보아 1903년 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콴뎬현(寬甸縣)으로 건너가 대한독립단 관남지부에서 활동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15일 서간도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서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圭)·조병준(趙秉準)·전덕원(全德元) 등 각 단체대표 560여 명이 모여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로 주로 의병계열의 인물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주로 국내와 서간도 각지에 지단(支團)을 설치하고, 밀정 처단과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국내에서는 방화단과 암살단 등을 조직하여, 일시에 대규모의 항일무장투쟁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1921년 벽창의용대(碧昌義勇隊)에 가입하였다. 이 단체는 1920년 8월 콴뎬현에서 대한광복군사령부의 별동대로 결성되었다. 사령부는 1920년 4월경 대한독립단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독립전쟁의 전개를 목표로 결성한 조직이었다. 벽창의용대는 이름에서 보이듯알 수 있듯이 평안북도 벽동군(碧潼郡)과 창성군(昌城郡)의 경계지점에서 결성되었는데, 대한독립단 시절부터 함께 활동해 온 동지 양승우(楊承雨)가 단장이었다. 1921년 6월 양승우와 함께 군자금 모집과 친일분자 처단 활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창성군(昌城郡) 신창면 (新倉面) 풍동리(豊洞里)에 위치한 오석찬(吳錫燦)의 집에서 300원의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그가 응하지 않자 갖고 있던 권총으로 부상을 입혔고, 저항하는 그의 처남을 처단하였다. 7월에는 같은 곳에 거주하는 오초여(吳楚與)를 찾아가 처단하고 군자금 200원을 획득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다가 1923년 봄 신의주경찰서에 붙잡혀, 1926년 4월 21일 신의주지방법원 제1호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 재판에서 “나의 행동은 결코 살인강도가 아니다. 오직 흰옷 입은 대중의 복리를 위하여 그에 방해되는 것을 배제하며 그에 이로운 것을 보호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각오 아래 그 일에 착수한 이상 죽는 것을 아끼는 비열한 내가 아니지만, 우리 흰옷 입은 사람으로 색옷 입은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받는 것이 오직 통분할 따름이다” 라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밀정을 처단한 것임을 당당히 밝혔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재판에 대해 “재판정 내외에는 수많은 방청객이 입추(立錐)의 여지없이 모였으며, 정·사복 경관들의 삼엄한 경계 하에 진행된 근래에 보기 드문 큰 공판이었다”고 보도하였다. 1926년 5월 1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강도살인죄로 사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몇 차례 재판이 연기된 가운데 그 해 9월 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1926년 11월 8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결국 1926년 12월 23일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황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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