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협
朴康協1899 ~ 1932. 4. 9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함흥청년회
- ·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 · 함흥청년동맹
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관련 사건
- · 함흥지역 동맹휴교사건
- · 태평양노조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0) 1899년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 하서면(河西面)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박연(朴然)·박영(朴英)을 사용하였다. 유년, 청년시절 성장 및 수학과정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로 파악되지 않는다. 함흥에서 청년회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운동에 관계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25년 함흥청년회(咸興靑年會)에 몸담으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나섰다. 그 해 6월 14일 오후 9시 청년회원 권병두(權炳斗)·원형곤(元亨坤)과 함께 동명극장에서 「예술에 대한 진정한 가치와 현대 사회의 결함」이라는 주제로 연설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연설 직후 함흥경찰서에 구금당하였다. 7월 14일 오후 4시 함흥청년회 집행위원회가 열렸는데, 이귀하(李龜河)·정규회(鄭奎會)·장재원(張載元) 등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6년 대중신문사(大衆新聞社) 함흥지국 대표로 활동하였다. 『대중신문』은 일본에서 발행되던 신문이었다. 7월 6일 『대중신문』을 홍보하는 과정에서 반일(反日)적인 선전을 하였다. 함흥경찰당국은 이른바 보안법 위반을 적용하여 29일간 구류(拘留)처분하였다. 10월 24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함흥청년회의 방치규(方致規)·한림(韓林)과 함께 동명극장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여기서 「민중(民衆)의 진로(進路)」라는 제목으로 민중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27년 5월 16일 북풍회(北風會) 계열인 함흥목공조합(咸興木工組合) 대표 자격으로 서울 종로 중앙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열린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朝鮮社會團體中央協議會, 이하 중앙협의회) 창립대회에 참석하였다. 중앙협의회는 1926년 2월 17일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인사들이 참여하여 조직한 단체였다. 창립대회에서는 중앙협의회를 상시기구로 인정하느냐, 아니면 일시적인 단체로 규정할 것인가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졌다. 서울청년회 인사들은 상설기구화를 주장하였고 한신교(韓愼敎)·박원희(朴元熙) 등은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의 분열에 대비하여 무산계급정당 설립을 위해 중앙협의회를 지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에 반해 북풍회 인사들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제휴하여 창립한 신간회(新幹會)가 존재하기 때문에 중앙협의회는 비상설화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하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수적으로 우세한 북풍회 계열이 주창한 비상설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끝났다. 같은 달 17일 오후 2시경 북풍회 인사인 김평산·남연철 등과 함께 명치정(明治町, 현 서울 명동 일대)에서 회합을 가졌다. 여기서 신간회가 조선공산당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신간회의 정체를 명확하게 해야 하며, 이를 위해 ‘정치연구회’를 조직하기로 뜻을 모았다. 18일에도 북풍회 인사들이 회합을 가졌지만, 일제 경찰의 탄압에 의해 해산되었다. 1928년 함흥청년동맹(咸興靑年同盟) 검사위원(檢査委員)으로 활동하였다. 6월 4일 집행위원장 방치규, 집행위원 이몽웅(李蒙熊)·김준식(金峻植)·홍달수(洪達洙) 등과 함께 함흥군 서양리(西陽里)에 소재한 함흥청년동맹회관(咸興靑年同盟會館)에서 제1회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였다. 회의의 목적은 함흥지역 학생 동맹휴교(同盟休校) 사건 진상 조사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방치규와 함께 함흥고등보통학교(咸興高等普通學校)와 상업학교(商業學校) 동맹휴학 진상을 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해당 학교의 교장을 찾아가서 해당 학교 학생들의 동맹 휴학 현황과 당국자의 행정 조치 사항에 대해서 조사하였다. 6월 9일 조사를 마친 후 「맹휴진상조사서」와 고등보통학교 「생도요구진정서」를 배포했는데, 일제 경찰 당국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0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출판법 위반으로 벌금 80원을 선고받았다. 1931년 9월 18일 함흥면 운흥리(雲興里)에 소재한 자택에서 ‘태평양노동조합사건(太平洋勞動組合事件)’의 연루자로 일제 경찰에 다시 붙잡혔다. 1930년 12월경 김호반(金鎬盤)이 함흥에 프로핀테른 조선지부 함흥위원회를 조직하고 적색노조 결성 활동을 전개하다가 경찰에 발각되었다. 이후 일제 경찰은 관련자 색출 작업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붙잡혔다. 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받고 옥고를 치러야 했으며, 이때 위장병과 폐병을 얻었다. 1932년 4월 9일 함흥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서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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