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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달

閔泳達

1859. 1. 24 ~ 1924.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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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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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59년 1월 24일 서울에서 군수를 지낸 민관호(閔觀鎬)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 호는 우당(藕堂)이다. 민씨 척족으로 한미한 집안이었으나, 1884년 갑신정변 당시 우정국(郵政局)에서 민영익을 호위한 일을 계기로 명성황후로부터 각별한 배려를 받기에 이르렀다. 1885년 증광(增廣)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해 벼슬길로 나아가 1892년 경기관찰사를 거쳐 형조판서·예조판서·좌참찬·호조판서·내부대신 등 요직을 두루 지냈다. 그리하여 세간에서는 권세가 민영휘와 쌍벽을 이룬다고 일컬을 정도였다. 당대의 정객인 이완용(李完用)과 이윤용(李允用)을 조종한다고 할 정도로 수완이 있었으며 이재(理財)에도 남달리 뛰어난 재간을 지니고 있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정계에서 물러나 경기 파주로 낙향하여 은둔 생활을 보냈다. 1910년 나라가 망할 때 일제가 남작(男爵) 작위와 소위 은사금(恩賜金)을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 이후 서강 근처로 올라와 세상을 한탄하며 살고 있었다. 1918년 이회영(李會榮)이 찾아와 광무황제(고종)의 망명계획을 의논하자, 흔쾌히 동의하고 광무황제가 베이징(北京)에서 머무를 주택의 임차비와 수리비 명목으로 5만원의 거금을 건네주었다. 이때 내놓은 5만원이 만주 싼위안푸(三源堡)의 신흥무관학교 운영을 위한 것이었다는 설이 있다. 이 무렵 광무황제의 망명 계획은 1915년 신한혁명당이 추진하던 때보다 상당히 구체적으로 진행되어 갔으나, 1919년 1월 광무황제가 급서(急逝)하면서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1919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이달하가 찾아와 의친왕 이강의 망명계획을 의논해 오자, 직접 나서지는 못하였으나 공감의 뜻을 표하였다. 그 후 전협·최익한 등이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하고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적극 응하지 않았다. 1920년 10월 『동아일보』가 3개월 정간되었다가 1921년 1월 속간(續刊)할 자금이 없어 지연되는 상황에서 홍증식을 통해 동아일보사에 5,000원을 출자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장석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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