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석
金章錫1892. 5. 25 ~ 1926. 2. 27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원산청년회
포상 정보
- · 애국장(2009)
관련 사건
- · 원산부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09) 1892년 5월 25일 함경남도 덕원군(德源郡) 현면(縣面) 두산리(斗山里)에서 태어났다. 성년이 된 후 한문공부를 하다가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를 졸업하였다. 동리 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서 상업에 종사하기도 하였다. 기독교 감리교 신자로서 1919년 당시 향리에서 잡화상을 경영하고 있다가 원산부(元山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2월 28일 목사 정춘수(鄭春洙)와 장로교 신자 이가순(李可順) 등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원산부(元山府) 명석동(銘石洞)에 위치한 사립 진성여학교(震星女學校)에 모여 원산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원산 시내 요소요소에 만세를 부르기 위해 담당 지역을 정하고, 교인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3월 1일은 원산부 원산리(元山里) 시장 장날이었다. 이 날 오후 2시 각 교회에서 종이 울리자 동지들과 함께 약속한 장소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으로 행진하였다.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9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 같은 해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 그리고 7월 3일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감형되어 1920년 4월 28일 출소하였다. 출소 후 원산청년회(元山靑年會) 서기로 활동하면서 제2의 거사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원산부 장촌동(場村洞)에서 잡화상을 경영하던 중 1920년 8월 24일 미국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동아일보 원산지국 통신원인 김상익(金相翊), 잡화상 이용훤(李容暄)과 함께 일본의 가혹한 통치와 한민족의 불만을 폭로할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8월 20일 동지 이용훤과 함께 동아일보 원산지국에서 거사를 계획하고 각자 역할을 나누었다. 김상익과 이용훤은 8월 21일 밤 장촌동 김상익의 집에서 미국의원단 환영, 철시(撤市), 친일파 처단, 일본상품 매매금지, 관공서의 파괴 등의 내용을 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결사대 명의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다음 날인 8월 22일 이 격문 원고를 받아 덕원군 현면 두남리(斗南里)의 사숙교사(私塾敎師) 이봉운(李鳳雲)에게 의뢰하였고, 이봉운은 취성학교(聚星學校) 교사실에서 등사판으로 180매를 인쇄하였다. 이것을 그 날 밤 동아일보 원산지국에 가져가 김상익에게 절반을 배부하였고 나머지는 이용훤의 집에서 그에게 넘겨주었다. 미국의원단이 한국을 떠나고 시위의 진전이 없어 초조하던 차에 1920년 9월 23일 저녁 원산 남산교(南山橋) 부근에서 시작된 제2의 원산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김상익을 비롯하여 급히 동지들과 연락해 군중을 동원하였는데, 원산보광학교와 원산공립보통학교 학생 600명이 참여하는 대규모의 시위를 이끌었다. 남산교에서 출발한 시위대는 밤 10시에 조선식산은행 원산지점·동양척식주식회사 원산지점·원산우체국·장촌동파출소·상리파출소와 기타 주요 건물을 습격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전개하다가 다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20년 12월 23일 함흥지방법원, 1921년 2월 23일 경성복심법원, 그리고 같은 해 3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이른바 출판법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원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23년 9월 19일 풀려났다. 이후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수형 생활의 여독으로 팔 하나를 잘라내는 곤경을 치렀는데, 건강이 크게 악화되면서 1926년 2월 27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은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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