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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千特

千特

1888. 7. 23 ~ 1945.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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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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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義城)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의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5)

관련 사건

  • · 의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5) 1888년 7월 23일 경상북도 의성군(義城郡) 의성면(義城面) 도동동(道東洞)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18일 의성면 만세운동에 참여할 당시 도동동 기독교회 집사로 활동하였다. 의성군의 만세운동은 3월 12일 비안면(比安面)에서 시작된 후 4월 3일 가음면(佳音面) 구천(龜川)장터 단독시위에 이르기까지, 23일에 걸쳐 총 7개면에서 21차례 일어났다. 비안면 시위와 가음면 시위 사이에 안평면(安平面)·봉양면(鳳陽面)·의성면·점곡면(點谷面)·신평면(新平面) 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주로 기독교인들이 시위를 이끌었고, 특정 지역에서는 ‘만세꾼’이라 불리는 전문적인 조직이 활동하기도 하였다. 의성면 만세운동은 3월 18일에 일어났다. 이날은 3월 15일부터 19일에 걸쳐 일어난 안평면·점곡면·봉양면 등지의 만세운동 날짜와 겹친다. 의성면 만세운동은 소문면(召文面) 대리동교회(大里洞敎會) 교인들이 주도하였다. 소문면(召文面)에서는 장이 서지 않았기 때문에 의성면을 시위 장소로 택했다고 한다. 대리동교회 교인들에게 만세운동을 설득한 사람은 당시 교회 영수(領袖)였던 박낙현(朴洛鉉)이었다. 그는 대구 성경학교에 갔다가 만세운동을 접하게 되면서, 3월 12일과 13일에 같은 교회 집사였던 윤용구(尹龍九)와 교인 윤영주(尹營柱)·오상룡(吳相龍)을 만나 만세운동을 권유하였다. 그들은 의성장날인 3월 18일을 거사일로 잡고 시위를 준비하였다. 여기에 김자룡(金子龍)·김군석(金郡石)·신진수(申震洙) 등이 합류하였고, 안평면 석탑교회와 비봉교회 교인들도 참여하였다. 대리동교회 교인 주도하에 주변 교회 교인이 가세하는 양상이 펼쳐졌다. 만세운동에는 본래 학생들도 가세할 계획이었다. 윤영주의 주선으로 의성공립보통학교 학생인 정의진(鄭義鎭)·김덕암(金德岩)·구남술(具南述) 등이 시위 계획에 참여하였다. 그들은 학교 부근의 공자묘 뒷산에 모인 후 시장에서 교인들과 합류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시위 당일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경계로 인해 오후 1시 30분 시장이 폐쇄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계획과 달리 학생들은 만세운동에 참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낙현·윤영주·윤용구·오상룡 등은 몰래 시장에 진입하여 사람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날 장터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4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그 해 4월 25일 항소심인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었으나, 형량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에 다시 “조선 백성으로서 독립이 기뻐 축하의 만세를 불렀다”며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같은 해 5월 2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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