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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昌烈

昌烈

1885. 5. 3 ~ 1944.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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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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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양양(襄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강원도 양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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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양양군 강현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5년 5월 3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강현면(降峴面) 중복리(中福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양양군 강현면 물유리(沕溜里) 물치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5일과 6일 양양군 강현면과 도천면(道川面) 주민들이 강현면 물유리에 있는 물치시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였다. 도천면 중도문리(中道門里)에 사는 이석범(李錫範)은 동생 이국범(李國範)과 아들 이능렬(李能烈)을 앞세워 시위를 추진하였다. 거사일은 4월 5일 물유리 장날로 정하였다. 강현면에서는 장세환(張世煥), 도천면에서는 김영경(金英經)이 주민 동원을 맡았다. 이어 각 면별로 구체적인 역할 분담이 이루어질 때, 중복리에서 심한준(沈漢俊)과 함께 시위 준비를 맡아 태극기를 만들고 시위대를 조직하였다. 4월 5일 강현면의 시위 군중이 물치장터에 집결하였다. 오전 10시 무렵 물치장터의 쌀가게 앞에서 독립선언식이 열렸다. 대형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손에 태극기를 든 1,000여 명의 군중이 장터에 모였다. 강현면 시위대는 물치장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약 10리 정도 떨어진 대포리 경찰주재소로 행진하여 도천면민과 합세하였다. 시위대가 경찰주재소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이어가자, 주재소 수석 이시다(石田喜三郞)는 군중에게 허리를 굽히며 빌었다. 이에 시위대는 다음날 양양면(襄陽面)으로 가서 시위를 벌일 것을 약속하고 해산하였다. 4월 6일 시위대는 양양면으로 향하였다. 1,000여 명이 넘는 시위 군중은 연창리(連昌里)에서 일본군의 저지선을 뚫고 경찰서로 몰려갔다. 손양면(巽陽面)에서 온 시위 군중 약 3백여 명도 합세하였다. 경찰서장이 일본은 물러갈 터이니 만세만 부르고 돌아가 달라고 애원하여 결국 시위 군중은 저녁에 해산하였다. 4월 5일, 6일 양일간의 만세시위 주도자의 검거 선풍이 일어나면서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7년 12월 30일에 결성된 양양농민조합(襄陽農民組合)에서 활동하다가 1932년 10월경 130여 명의 조합원과 함께 체포되었다. 1934년 6월 22일 36명의 관련자와 함께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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