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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重植

重植

1901. 4. 11 ~ 1946.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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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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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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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원곡면
  • · 양성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901년 4월 11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 외가천리(外加川)⾥에서 태어났다. 양성공립보통학교(陽城公立普通學校)에서 3학년까지 수학하고 중퇴하였다. 1919년 안성군 원곡면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안성군 원곡면사무소 앞 모인 시위 군중 1천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 후 시위대는 양성면(陽城面) 방면으로 행진하였다. 원곡면 시위대가 원곡면과 양성면의 경계인 성은고개에 이르렀을 때, 시위 주도자였던 이유석(李裕奭)이 양성경찰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연설하였다. 이어 홍창섭(洪昌燮)·최은식(崔殷植) 등도 “조선은 독립국이 될 것이므로 일본의 정책을 시행하는 관청은 불필요하다”며 원곡면과 양성면 내의 주재소와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파괴하고, 안성군에서 일본인들을 몰아내자고 연설하였다. 이어 시위대는 양성면을 향해 행진하였다. 이날 안성군 양성면 덕봉리(德峰里) 주민 200여 명도 야산에 올라 독립만세를 부르고, 양성면 동항리(東恒里)로 향하였다. 덕봉리 시위대는 명목리(名木里)와 명당리(明堂里)·구장리(舊場里)·도곡리(挑谷里)·산정리(山井里) 주민들과 합세해 양성면 경찰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오후 9시 양성면 시위대가 해산하려고 할 무렵 원곡면에서 행진해 온 원곡면 시위군중과 만났다. 이들 원곡면과 양성면 시위대는 합류하여 오후 10시 다시 양성면 경찰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최은식이 양성면 경찰주재소 순사 주택 부엌에 있던 솔잎에 불을 붙여 사무실에 불을 붙이자, 횃불을 가지고 와서 사무실 내에 함께 불을 붙였다. 양성면 경찰주재소를 불태운 후 시위대는 양성우편소로 몰려가 시위를 이어나갔다. 최은식·오윤선(吳允先)·소후옥(蘇厚玉)과 함께 양성우편소 사무실 내 집기를 파괴하였다. 최은식과 김순서(金順西)·이희룡(李熙龍) 등은 양성우편소 부근의 전신주 3개를 잘라 넘어뜨리고, 우편소에서 안성으로 통하는 전화선을 절단해 통신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이후 시위대와 함께 일본인 잡화상 외리여수(外里與手)의 집으로 몰려가 돌을 투척하고, 상점 건물을 파괴하였다. 4월 2일 새벽 4시, 원곡면 시위대와 함께 원곡면사무소로 되돌아와 돌을 투척하고, 출입문을 방화하였다. 그리고 원곡면사무소의 집기류와 서류를 모아 숙직실 앞에 쌓아 둔 솔잎을 이용해 불태웠다. 이틀 간의 만세시위 후 일본군과 경찰이 5월 무렵 시위관련자를 검거할 때 붙잡혔다. 1920년 3월 22일, 재판에 회부되었고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방화, 소요 등으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7년 2월 24일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전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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