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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仲錫

仲錫

1883. 5. 16 ~ 1966. 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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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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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남 함흥(咸興)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함경남도 함흥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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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2)

관련 사건

  • · 함흥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2) 1883년 5월 16일 함경남도 함흥군(咸興郡) 함흥면(咸興面) 동양리(東陽里)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인으로 1919년 당시 영신학교(永信學校)에 교사이자 목사로 재임하면서 함흥군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평양(平壤)의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 교사인 강봉우(姜鳳羽)가 1919년 2월 26일 함경도와 간도지방을 순회하는 도중 함흥에 도착하면서 함흥의 만세시위 준비가 시작되었다. 강봉우는 함흥면 신창리교회(新昌里敎會)에서 함흥지역의 목사와 장로들을 대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정세와 식민지 조선의 처지를 설명하면서 향후 독립에 대한 준비를 역설하였다. 이어 원산(元山)의 광석동교회(廣石洞敎會) 장로인 이순영(李順榮)이 함흥면 중하리교회(中荷里敎會)를 방문하여 3월 1일 원산에서 만세시위를 거행할 것임을 알리고 함께 궐기할 것을 촉구하였다. 2월 28일 함흥지역 기독교 지도자로서 중하리교회에 모인 주도자들과 함께 만세시위 준비를 위해 자금을 조달하고 준비 조직을 만들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운동자금을 각출하는 일에 동참하였다. 이 자리에서 준비위원이 선임되었고 최명학(崔明鶴)이 낙민루(樂民樓)에 올라가서 나팔을 부는 것을 신호로 3월 3일에 일제히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움직임과 별도로 함흥고등보통학교(咸興高等普通學校)·함흥농업학교(咸興農業學校)·영생중학교(永生中學校)의 3·4학년 학생으로 구성된 함산학우회(咸山學友會)에서도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3월 1일 함산학우회는 간부회의를 통해 결사대를 조직하기로 결의하고, 3월 2일에는 함흥면 중리(中里) 권영주(權永周)의 집에서 3월 3일 새벽 4시 30분 서함흥역(西咸興驛) 앞에서 만세시위를 거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3월 2일 사전 계획된 두 만세시위와 무관한 만세시위가 함흥에서 전개되었다. 계획된 시위가 아니었지만 많은 군중들이 참여하면서 만세시위의 규모는 커졌다. 일본 경찰은 헌병·의용소방대와 재향군인들과 함께 시위대 300여 명을 붙잡았다. 또한 3일 새벽부터 함흥 전역에서 대대적인 예비검속이 실시되었다. 그 과정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하던 기독교 지도자들과 함산학우회 간부들과 함께 붙잡혔다.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 해 7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자 다시 “나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기초하는 의사 발동으로 범죄가 아니다”라는 취지로 상고하였다. 1919년 9월 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신창리교회 목사로서 함남노회(咸南老會) 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함흥 기독교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또한 함흥기독교청년회(咸興基督敎靑年會) 부회장 등을 역임하는 등 함흥지역 사회운동에도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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