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생
金重生1885. 7. 3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1)
관련 사건
- · 하발면
- · 군내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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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11) 1885년 7월 3일 함경남도 고원군(高原郡) 군내면(郡內面) 상석연리(上石淵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고원군 하발면(下鉢面)과 군내면(郡內面)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고원군의 만세시위는 천도교 고원교구 종리원(宗理院)의 원장 조동원(趙東源)과 김달현(金達鉉)·박윤식(朴允植) 등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1919년 3월 6일 처음 일어났다. 그러나 3월 14일 만세시위를 계획했던 청년들이 사전에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붙잡히면서 경계가 삼엄해졌다. 또한 고원 헌병 분견소는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고원군의 시장들을 폐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수동면(水洞面)의 장로교인인 유관흥(劉寬興)은 같은 면의 유지이자 천도교 신자인 김명국(金明國)을 방문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논의하였다. 이들은 3월 19일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합동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시위에 동참할 인물들을 섭외하였다. 이 계획을 전해들은 후 김대복(金大福)·김한수(金漢洙)·맹태유(孟泰裕)·엄치인(嚴致仁)·오창옥(吳昌玉) 등과 함께 만세시위 계획에 참여하였다. 천도교 신자이자 고원경찰서 고등계 형사 보조원인 이양화(李陽化)도 동참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3월 18일 군내면 하고읍리(下古邑里) 소나무 숲에서 태극기 300여 개를 제작하였다. 하발면(下鉢面) 관덕리(觀德里)의 장날인 3월 19일, 500여 명의 군중이 관덕리 하시장(下市場)에 모여들었다. 이때 유관흥·김대복·맹태유·엄치인 등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대는 태극기를 흔들며 군내면의 면 소재지인 상석연리(上石淵里) 덕지시장(德池市場)으로 행진하였다. 그곳에서 기독교인 100여 명이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시위대의 규모가 커졌다. 그러나 출동한 경찰과 헌병들의 탄압에 의해 시위대는 해산되었고 이 과정에서 붙잡혔다. 1919년 4월 18일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1919년 5월 1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고 다시 “자기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근거하여 의사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므로 제1심 및 제2심에서 받은 유죄의 판결은 부당하며 복종할 수 없는 위법한 것”이라는 취지로 상고하였다. 1919년 6월 12일 고등법원이 이를 기각하면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종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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