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禹根
禹根1866. 11. 23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6)
관련 사건
- · 양양군 현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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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6) 1866년 11월 23일 강원도 양양군(襄陽郡) 현북면(縣北面) 중광정리(中光丁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양양군 만세시위 당시 중광정리의 구장을 맡고 있었다. 양양군 현북면의 시위는 기독교인과 유학자, 각 마을의 구장들이 함께 준비하였다. 원일전리(元日田里)에 사는 유학자인 박규병(朴奎秉), 박원병(朴元秉)과 감리교회에 다니는 오세옥(吳世玉)과 이응렬(李應列)이 먼저 독립시위를 준비하였다. 여기에 현북면 유지인 임병익(林秉翼)과 오정현(吳鼎鉉)이 합세하였다. 이 때 마을 구장들과 함께 만세시위 계획에 가담하였다. 독립선언서는 박원병이 입수하였다. 구장으로서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연락문서는 면서기의 경력을 가진 오정현이 담당하였다. 직접 연락을 담당한 사람은 이응렬과 상광정리의 포수(砲手)인 김종대(金鍾大)였다. 거사일은 4월 9일로 잡았다. 준비 과정에서 박원병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있다가 발각되어 양양경찰서에 구금되는 일이 일어났다. 시위 계획이 탄로 날까 우려한 형 박규병은 원일전리에 사는 박용규(朴容圭)와 장리(獐里)에 사는 서당 훈장인 이성윤(李聖允)과 의논하여 시위일을 4월 7일로 바꾸었다. 1919년 4월 7일 원일전리, 장리, 도리의 주민들과 서당 학생 30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서면(西面) 용천리를 거쳐 양양면내로 행진하였다.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경찰과 대치하면서 만세를 부르고 경찰에게 구금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이날 시위로 이성윤은 은신하였고 박용규와 박규병은 붙잡혔다. 본래 예정한 4월 9일에도 시위가 일어났다. 4월 9일 하광정리에 있는 면사무소 앞에는 각 마을에서 동원한 1,0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였다. 이때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시위에 합류하였다. 시위대는 면장이 나올 것을 요구하였으나, 면장은 면서기와 함께 숨으며 면사무소 서류까지 감추었다. 시위대가 만세시위를 벌이며 양양면으로 행진하려고 하였으나 마을 유지인 김익제(金翼濟)가 이를 만류하여 1㎞ 떨어진 기사문리(其士門里)에 있는 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에는 헌병과 함께 4월 8일 강릉으로부터 지원 온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군인과 헌병은 주재소 옆 개울 언덕에서 고개를 넘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선두에 섰던 9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총상을 입었다. 시위 중에 붙잡혀 1919년 11월 12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벌금 30원, 노역기간 30일을 받고 항소하였다. 1920년 3월 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은 취소되고 징역 6월(미결 구류 일수 중 180일 본형 산입)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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