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주
文榮柱1909. 10. 30 ~ 1970. 6. 3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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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909년 10월 30일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북평면(北平面) 이진리(梨津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문희동(文喜同)을 사용하였다. 19세 때 마을의 개량서당을 졸업하고 이 서당의 교사와 해남군 북평면 어업조합의 임시서기를 역임하였다. 1931년 9월 중 일본으로 건너갔다 돌아왔다. 1932년 4월 경 동지 김홍배(金洪培)와 함께 도쿄(東京)에 가서 노동절 선전 유인물을 살포하여 구류처분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귀국하여 이후 해남군 북평면 사무소의 면서기로 재직하였다. 다시 도쿄로 가서 그곳에서 김홍배와 차태희(車泰喜) 등과 함께 교류하면서, 김홍배로부터 항일민족의식에 관한 교육을 받았다. 당시 김홍배는 와세다(早稻田)대학 전문부를 중퇴한 상태로 도쿄에서 차태희를 만나 이들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이후 1933년 1월 28일 같은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 최상춘(崔相春)의 집에서 동지들과 모여 완도와 해남의 정세를 논의하고 농민운동 지도기관 설치 등의 문제에 관해 협의하였다. 그리고 향후 더욱 양 지역의 연계를 긴밀하게 하기로 약속하였다. 같은 해 7월 10일 오후 8시 이진리의 이진학원에서 김홍배·김아기(金阿其)·김암우(金巖于)·차태희 등과 함께 재차 회합하여 북평면 김 어업조합원으로 하여금 조합의 공제저금 환불요구를 하도록 협의하였다. 이들은 같은 해 10월 13일 오후 8시경 다시 이진학원에 모여 김기배 등과 함께 풍수해로 인한 농작물 흉작을 이용하여 소작인들을 규합하고 소작료 감면요구 관철을 위해 이를 전면적인 소작쟁의로 발전시겨 이 쟁의를 통해 빈농대중을 획득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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