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鴻基
鴻基1884. 10. 2 ~ 1954. 5. 16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유림단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차 유림단 의거(파리장서운동)
- · 2차 유림단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4년 10월 2일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봉화읍(奉化邑) 해저리(海底里, 바래미)에서 태어났다. 자는 순우(順遇), 호는 만창(晩蒼)이다.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의 사종질(四從姪)이다. 일제가 추동(楸洞) 선영에 공원을 만들고자 문중을 압박하였으나, 거세게 반대해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일화가 있다. 강한 척사(斥邪) 의식을 지닌 의성 김씨 해저 문중의 중심 인물로 1·2차 유림단 의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김창숙이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 1차 유림단 의거)을 준비하며 봉화에 머물 때, 자신의 집인 만회고택(晩悔古宅, 국가민속문화재 제169호)의 사랑채를 모임 장소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연락하는 일을 도맡아 동참자 확보에 힘썼으며, 유림 대표를 만나 서명 받는 역할을 하였다. 이때 파리강화회의에 보낼 한국독립청원서 초안이 만회고택 사랑채 명월루(明月樓)에서 작성되었다. 1919년 3월, 김창숙이 봉화에 도착하자 자신의 집에서 문중 유림 다수와 회합했으며 다음 날에는 김창숙과 함께 문중 어른들을 만나 거사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 다음 날에도 김창도(金昌道)의 집에서 일가 30여 명과 함께 만났다. 이때 일제 경찰 한 사람이 김창숙을 의심하며 찾아와 취조하자, 직접 나서 이를 멈추도록 설득하였다. 이러한 활동에 힘입어 해저와 인근 유곡마을의 유림이 파리장서운동에 서명자로 다수 참여하였다. 일제 경찰은 1919년 4월부터 파리장서운동 관련자를 붙잡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같은 마을의 김건영 등과 함께 1919년 5월 28일에 붙잡혔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1925년 11월 3일, 김창숙의 서신을 받고 독립기지 건설자금 모집 활동(2차 유림단 의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문중 사람들을 만나 모금에 참여하도록 연락하고, 자금 징수에도 직접 나섰다. 서신을 전달한 이는 안동(安東)·봉화·성주(星州)·대구(大邱)의 자금 모집을 담당한 정수기(鄭守基)였다. 먼저 김창숙의 종제(從弟)인 김창백(金昌百)의 집에서 김뇌식(金賚植)과 정수기의 만남을 주선했으며, 정수기·김창백과 함께 춘양(春陽)의 권상경(權相經)·강필(姜泌)을 만나 독립자금을 모았다. 김창숙의 족숙(族叔)인 김뇌식은 이후 독립자금으로 3,000원을 제공하고 아들과 함께 군자금 징수와 운송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6년 4월 독립자금 모금 활동이 일제 경찰에 드러나면서 김화식(金華植) 등 주요 인물이 붙잡혔다. 1927년 7월부터는 경북 지역 관련자들도 추적당하기 시작하였다. 7월 초 일제 경찰에 붙잡혀 혹독한 심문을 받다가, 7월 23일 대구지검에서 기소유예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1953년 가을부터 앓기 시작한 늑막염이 악화되어 1954년 사망하자, 김창숙은 “그대가 죽음에 옛 덕이 증명할 곳이 없어 뭇 도깨비가 낮에 횡행한다”는 제문을 지어 슬퍼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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