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연
金俊淵1895. 3. 14 ~ 1971. 12. 3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호남친목회
- · 조선기독교청년회
- · 신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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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민당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2.8독립선언
- · 세계약소민족대회(세계피압박민족대회)
- · 조선공산당 사건
- · 신간회운동
- ·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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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95년 3월 14일 전라남도 영암군(靈巖郡) 영암읍(靈巖邑) 서남리(西南里)에서 김상경(金相逕)과 모친 청주 한씨(淸州) (韓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호는 낭산(朗山)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다가 1908년 영암보통학교(靈巖普通學校)에 입학하여 1910년 졸업하였다. 이후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 한성고등보통학교(漢城高等普通學校)(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3월 23일 졸업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가 1917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법학부 독법과(獨法科)에 입학하였다. 도쿄제국대학 유학 중인 1917년 12월 백관수(白寬洙) 등과 함께 호남친목회(湖南親睦會)를 조직하였다. 이후 도쿄조선유학생학우회(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 등에서 주최하는 국내외 각종 행사에서 강연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조선기독교청년회(朝鮮基督敎靑年會)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1919년 2·8독립선언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다. 같은 해 11월 3·1운동 기획과 관련하여 상하이(上海)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여운형(呂運亨)이 일본에 왔을 때 신인회(新仁會)를 중심으로 환영회를 조직하고 조선독립을 선전하기도 하였다. 1921년 10월 초 일본 고베(新戶)를 출발하여 중국 상하이, 홍콩(香港) 등지를 거쳐 독일로 건너갔다. 1922년 베를린대학(Humboldt University of Berlin) 법학과에 입학하여 법률학과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1924년 베를린대학 졸업 후 그 해 10월 귀국길에 올라 1925년 2월 초에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인 1925년 2월 21일 『조선일보』 기자로서 모스크바(Moscow) 특파원으로 파견되었다. 같은 해 6월에 귀국했는데, 중국에 도착해서부터 귀국 후까지 총 40회에 걸쳐 「노농 러시아의 현상」을 연재하였다. 같은 해 9월 15일 백남훈(白南薰)·백관수·안재홍(安在鴻)·이순탁(李順鐸)·백남운(白南雲)·홍명희(洪命熹) 등과 함께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이어 같은 해 10월에는 천도교청년당(天道敎靑年黨)의 김기전(金起田)·조기간(趙基栞)·이돈화(李敦化)·이성환(李晟煥)·선우전(鮮于全) 등과 함께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를 결성하였다. 이후 1926년, ‘서울파’의 전위조직인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에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14일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즈음 안재홍 등과 함께 최남선(崔南善)·이광수(李光秀) 등의 자치운동단체 조직 계획을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에 통보하여 그 계획을 무산시켰다. 같은 해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1월 이관용(李冠鎔)·안재홍 등과 함께 『현대평론』 창간에 참여하였고 같은 해 2월 벨기에 브뤼셀(Brussels)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공식적으로 조선 대표단이 참가할 수 있도록 주선하며 여비 등을 지원하였다. 대회 개최 소식을 알고서 베를린대학 유학 시절 친구이자 독일 조선인 유학생단체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의 핵심 인물인 이극로(李克魯)에게 대회 개최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직접 만주로 건너가 여비 등을 보냄으로써 조선 대표단이 정식으로 파견되도록 앞장섰다. 한편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의 일환으로 조직된 신간회(新幹會) 창립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신간회 창립총회에서 간사로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이어 같은 해 10월 동아일보사의 편집국장이 되었으며, 당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강사로도 활동하였다. 1927년 9월 20일 안광천의 뒤를 이어 조선공산당 책임비서를 맡아 조직 개편을 단행하는 등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하다가 일제의 추격으로 그 해 11월에 사임하였다. 1928년 1월 ‘조선공산당 제3차 탄압사건’, 일명 ‘ML당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붙잡혔다가 2월 초에 풀려났지만 1928년 5월 31일 같은 사건으로 다시 붙잡혀 구속되었다. 1930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년(미결구류일수 600일 본형산입)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 1934년 7월 25일 형 집행 만기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 『동아일보』 주필로 활동하였다. 1936년 8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우승하자, 『동아일보』에 손 선수의 앞가슴에 붙인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리고 게재하였다.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같은 달 27일 『동아일보』는 무기정간을 당하게 되었고 사장 송진우(宋鎭禹) 등과 함께 1937년에 사임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22일,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의 중앙위원이 되었다. 같은 해 9월 6일 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다음날인 7일 송진우·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임시정부 법통 봉대’를 내세우며 국민대회준비회(國民大會準備會)를 조직하였다. 이어서 같은 달 16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한민당)을 결성하였다. 1946년 한민당 상무집행위원으로서 노동부장, 선전부장 등을 지냈으며, 입법의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법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으며 1948년 5월 10일 영암군 초대 국회의원으로 무투표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1949년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상임상무위원, 1950년 법무부 장관, 1951년 대일(對日)강화조약 초안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54년에는 민주국민당 후보로서 제3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어 이후 제6대까지 영암군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1955년에 동아일보사의 중역, 1956년 민주당 최고위원, 유엔 한국대표 등으로 활동하다가 1957년 민주당을 탈당하고 통일당을 결성하여 총재가 되었다. 1963년 자유민주당(自由民主黨) 대표 최고위원이 되었으며, 1967년 민중당(民衆黨) 총재로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이후 사망 때까지 신민당에 평당원으로 참여하였다. 저서로 『독립노선』 (1947), 『한국민주당소사』 (1948), 『나의 소전(小傳)』 (1957), 『나의 길』 (1966), 『나의 편력』 (1969) 등이 있다. 1971년 12월 31일 서울 금호동 자택에서 7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장례는 1972년 1월 7일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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