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공선
南公善1888 ~ 1924. 11. 13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창동학원
- · 간민교육회
- · 간민회
- · 북일학교
- · 한민학교
- · 전로한족대표자회
- · 전로한족회 중앙총회
- · 일세당
- · 중한노공동맹연합회
- · 군사통일촉성회
- · 군사통일회의
- ·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 ·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포상 정보
- · 독립장(1996)
관련 사건
- · 국민대표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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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6) 1888년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남성우(南性祐)이고, 호는 수천(脩泉)이다. 남철우(南撤祐)와 남종우(南宗祐)가 동생이다. 서울의 보성학교(普成學校) 전문과를 졸업하고 원산공립보통학교(元山公立普通學校) 교사로 근무하다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북간도로 건너가 옌지(延吉) 와룡동(臥龍洞)에 정착하였다. 이병휘(李炳徽)·오상근(吳祥根) 등과 이주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주의 구국운동을 구현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1907년 창동소학교(昌東小學校)를 설립하였다. 1910년에는 중학부를 신설하고 학교 이름을 창동학원(昌東學院)으로 고쳤다. 중학부에 군사훈련과를 두었는데, 중학부 졸업생 중 상당수가 왕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의 대전학교(大甸學校)(나자구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독립군 간부로 성장하였다. 1909년 북간도 거주 한인의 자치와 경제력 향상 도모, 독립운동 추진을 목표로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가 발기되어, 1910년 3월 중국 당국의 허가를 얻었다. 간민교육회는 순회연설 활동을 통해 한인 학교의 설립을 유도하였다. 1912년 계봉우(桂奉瑀), 정재면(鄭載冕)과 함께 교과서 편찬위원에 임명되어 민족교육 교재 편찬에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간민교육회에서 편찬한 역사교과서로는 『대한역사』·『유년필독』·『대동역사략』·『월남망국사』·『오수불망(吾讐不忘)』·『최신동국사』 등이 있다. 1913년 간민회(墾民會) 설립 후 중앙총회 법률연구부장에 선임되었다. 1914년에는 간민회 산하에 항일결사인 동제회(同濟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또 정재면과 함께 청년친목회를 조직하여 간부로 활동하면서 『청년』이라는 잡지를 발행하였다. 1915년 이동휘(李東輝) 등이 왕칭현 나자구에 설립한 무관학교인 대전학교가 일본영사관의 압박에 의해 폐쇄되자, 이를 이어받아 1917년 1월 훈춘현(琿春縣) 대황구(大荒溝)에 설립된 북일학교(北一學校)에서 오영선(吳永善)·고경재(高京在)·김하정(金夏鼎)·장기영(張基永) 등과 교사로 근무하며, 학생들에게 역사 과목을 가르쳤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이후 연해주로 이주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의 한민학교(韓民學校) 교사가 되었다. 그 해 8월 29일 국치일 기념식에서 학생들에게 한국역사에 대한 강연을 했으며, 11월 17일 개최된 4250주년 단군대조 성탄기념회에서 한민학교를 대표하여 연설을 하였다. 1918년 6월 13일부터 개최된 제2회 전로한족대표자회에서는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대회에서 수립된 전로한족회 중앙총회가 기관지인 『청구신보(靑邱新報)』를 『한족공보(韓族公報)』로 개칭한 뒤, 박은식(朴殷植)·윤해(尹海)·조완구(趙琬九) 등에 이어 주필이 되어 전면에 항일 기사를 게재하여 국권 회복을 주장하였으며, 국치일에는 각종 행사를 벌여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1월 간도에 있는 박경철(朴景喆)·이성근(李聖根) 등에게 서신을 보내, 제2회 전로한족회중앙총회에 대표 파견을 요청하여, 2월 25일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로 개편되어 연해주와 북간도를 아우르는 독립운동단체가 되는 데 기여하였다. 1919년 6월 15일 전일(田一)과 북간도로 가서, 장기영·구춘선(具春先)·유예균(劉禮均) 등과 나자구에 한족독립운동의사부를 결성하기로 했다. 그 해 7월에는 신한촌에서 김립(金立)·장도정(張道定)·최성우(崔聖禹)·한용헌(韓容憲)·전일 등과 일세당(一世黨) 결성을 발기하였다.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가 통합하여 상하이에 ‘통합’ 임시정부를 수립키로 결정되자, 1919년 9월 ‘통합’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지명된 이동휘·김립과 상하이로 갔다. 1920년 1월 상순 상하이 미국 조계에서 열린 중한노공동맹연합회(中韓勞工同盟聯合會)에 러시아 지역 기독교 대표로 참여하였다. 1920년 9월 베이징(北京)에서 박용만(朴容萬)·신숙(申肅)·신채호(申采浩)·이회영(李會英)·배달무(裵達武)·김대지(金大池)·김갑(金甲)·장건상(張建相) 등과 군사통일촉성회를 조직하고, 군사통일촉성회의 취지를 설명하기 위해 북간도로 파견되었다. 1921년 4월 17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군사통일주비회에 대한국민의회의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때 참가 단체의 대표원 자격심사위원에 선임되었다. 4월 19일 회의에서 명칭이 군사통일회의로 결정되었고, 4월 20일 신숙·김갑·박용만·이장호(張建相) 등과 시국문제연구위원에 선임되었다. 4월 25일 성준용(成俊用)이 사임하자 군사위원으로 보선되었다. 5월 23일에는 군사단체의 통일과 군사기관의 설립을 위한 러시아지역 파견 군사조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1921년 4월 24일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불승인안을 통과시킨 후, 박건병(朴健秉)과 함께 임시정부에 보낼 통첩의 내용을 기초하였다. 그리고 군사통일회의 개회와 때를 같이 해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을 비판하는 성토문 서명에 참여하였다. 성토문 서명에 참여한 54명은 신채호·장건상·김창숙(金昌淑)·김원봉(金元鳳)·이극로(李克魯) 등 각지의 독립운동단체를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1921년 5월 12일 상하이에서 안창호(安昌浩)가 국민대표회의 개최 문제를 제기한 사실이 알려지자, 군사통일회의는 국민대표회의의 조속한 소집을 결의하였다. 이에 1921년 6월 2일 신숙·김갑·박용만·박건병과 함께 국민대표회주비원으로 선임되었다. 국민대표회 개최 일자가 1922년 9월 1일로 정해지자 신숙·강구우(姜九禹)와 함께 국민대표회 대표로 상하이로 갔다. 실제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1월 개최되었고, 개조파와 창조파의 대립으로 결렬되었다. 이후 창조파로 조직된 국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1년 8월 베이징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이 결성될 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표’ 자격으로 조훈(趙勳)·이괄(李括)·김호반(金鎬盤)·박헌영(朴憲永)과 함께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활동 중 중병으로 1924년 11월 13일 베이징 중앙병원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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