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好善
好善1911. 3. 23 ~ 2001. 8.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전남노농협의회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911년 3월 23일 본적지인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읍 누문정(樓門町)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하여 활동한 친형 김덕선(金德善)의 영향을 받아 사회운동에 나섰다. 1928년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곡성 출신 대지주이자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정수태(丁秀泰·丁洙泰) 저택에서 가정교사 생활을 하였다. 정수태 집을 수시로 드나들던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의 수발을 들면서 사회운동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배후에서 운동을 지도하던 장석천(張錫天)·최인식(崔仁植) 등 청년들을 도와서 격문을 인쇄하고 연락하는 일을 맡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서울로 온 장석천 등이 체포되고 수사망이 좁혀지자 1930년 5월경 정수태의 주선으로 일본 도쿄(東京)로 몸을 피하였다. 도쿄에 머무르는 동안 한인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였다. 그 해 10월 귀국한 후 얼음가게, 채소 판매업에 종사하며 진로를 모색하였다. 1931년 8월 1일 국제반전(反戰)기념일을 기하여 종연방직(鍾淵紡織) 광주제사공장, 광주도시(道是)제사공장, 약림(若林)제사공장, 조일(朝日)고무공장 앞에 뿌려진 격문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붙잡힌 후 10여 일 만에 풀려났다. 1931년 8월 하순에는 엠엘파(ML파) 공산주의자 이응규(李應奎)와 김기선(金琪善)이 전남으로 왔을 때 비밀결사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응규와 김기선은 1927년 이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과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에서 활동하였고, 1931년 7월 25일 경북 대구에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를 결성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들과 연결되면서 본격적으로 비밀결사에 참여하였다. 일제측 자료에 따르면 1931년 9월경부터 이응규를 자주 만나 실천운동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고 한다. 1931년 10월 하순 이응규의 지도하에 송회갑(宋晦甲)·김준수(金俊琇)와 함께 광주노동조합(光州勞動組合)을 결성하고 정미·철공·운수·자유부문 노동자 조직업무를 담당했다. 그 해 11월경부터 최창진(崔昌鎭)과 광주노동조합 기관지 『노동자신문』을 3회에 걸쳐 각 수십 부씩 발간하고 배포하였다. 1932년 1월에 발간된 『노동자신문』 특별호에는 「종방 노동자제군」, 「종방에 대해서」 등 일본대자본에 의해 설립된 종연방직 관련 기사를 게재하였다. 1931년 12월 19일 광주읍에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의 이응규와 김기선, 광주노동조합의 송회갑과 김준수, 전남농민조합의 김영재(金永才)와 정시환(鄭時煥), 전남노농협의회 임시사무국의 김백동(金百東)과 박만춘(朴晩春), 나주의 윤승현(尹昇鉉)과 함께 열성자대회를 열었다. 김기선을 의장, 윤승현을 서기로 삼아 의사를 진행한 결과 전남 각지의 혁명적 노동조합·농민조합 및 반제동맹의 건설과 연락 통일을 도모할 기관으로서 전남노농협의회(全南勞農協議會)를 결성하고 총책임 겸 조직부 책임을 맡았다. 이후 도내 17개 사회운동 단체를 흡수하여 조직부 산하 노동부, 농민부, 반제부로 재편성하고,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에서 발간하는 『코뮤니스트』, 『봉화』 등의 비밀 출판물을 배포하면서 조직을 다져나갔다. 1932년 1월 광주공립농업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징역 1년을 받은 최차도(崔次道)를 전남노농협의회에 가입시킨 후 노농부에 배치하고, 거주지인 광주군 송정면 송정리에서 조직 활동을 하게 하였다. 같은 달 14일에는 1928년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던 곡성군의 정동화(鄭東華)를 전남노농협의회에 가입시키고, 옥과노동회를 거점으로 활동하도록 하였다. 1월 18일에는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다니면서 같은 학교 친구들과 사회과학연구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운영 중인 조기원(趙琦元)을 전남노농협의회에 가입시킨 후 『학생뉴스』에 게재할 원고를 집필토록 하였다. 이 무렵 대구형무소에서 나온 장석천이 광주를 방문하자 전남노농협의회의 운동 방침을 소개한 후 비밀출판물 간행에 관한 협력을 구하였다. 이에 따라 장석천은 출판자금 조달 등의 임무를 띠고 상경하였다. 1932년 2월 출판부 책임자 윤승현, 반제부원 최창진과 공동으로 전남노농협의회 기관지인 『전남노동자신문』 약 150부, 『학생뉴스』 약 30부, 3·1운동 기념 격문 약 150부를 인쇄 제작하였다. 『전남노동자신문』은 회원과 협력단체 등에 배포 완료하였지만 『학생뉴스』와 3·1운동 기념 격문을 미처 배포하지 못하고 1932년 2월 하순경 광주경찰서에 붙잡혔다. 1934년 11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받았다. 붙잡힌 지 약 2년 8개월 후인 1934년 10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제1심 공판 첫날에는 예심중 사망한 동지 김준수를 추도케 할 일, 재판정에 나온 동지들끼리 악수를 교환케 할 일 등 세 가지 요구 조건을 주장하면서 재판장과 언쟁을 벌였다. 결국 재판장은 사실 심리를 하기 전, 김준수에 대한 묵념을 허용하였다. 광복 후 1946년 2월 15~16일, 서울에서 개최된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후 장재성 등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들과 함께 ‘학생의 날’ 기념일 제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이애숙⋮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