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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수

金必壽

1905. 4. 21 ~ 1972.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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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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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김해(金海)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김해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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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조선공산주의청년회
  • · 근우회
  • · 조선공산당

포상 정보

  • · 애족장(2010)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0) 1905년 4월 21일 태어났으며 본적지는 경상남도 김해군(金海郡) 김해읍(金海邑) 지내리(池內里)이다. 이명으로 김필수(金弼壽)·박혜숙(朴惠淑)·재노반·따노바·차노바·치야노파(チヤノ-パ)·최성려 등을 사용하였으며, 광복 이후 중국 옌볜(延邊) 조선족자치구에 체류할 당시의 이름은 김찬해(金灿海〮金燦海였)다. 1922년 서울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교원 권태희(權泰熙)로부터 민족운동과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26년에 졸업한 뒤 1928년까지 2년 동안 같은 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다. 이 시기 고광수(高光洙)의 지도로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고, 조선공산주의청년회(朝鮮共産主義靑年會)에 가입하여 독서회와 웅변모임 등을 조직하였다고 한다. 이 단체는 화요파(火曜派)가 중심이 된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로 판단되며, 1928년 3월에는 학생부 위원이 되었다. 1926년 12월 5일 서울 낙원동에서 중앙여자청년동맹(中央女子靑年同盟) 결성에 참여하였다. 중앙여자청년동맹은 화요파의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과 서울파의 경성여자청년회(京城女子靑年會)가 통합하여 ‘무산계급의 승리 및 여성해방을 위해 청년여자의 단결과 분투, 청년여자의 대중적 교양과 조직적 훈련’을 기치로 내걸었다. 1927년 5월 조직된 근우회(槿友會) 활동에 참여하였으며, 1928년 2월 24일 개최된 근우회 경성지회 제1회 창립준비위원회에서 서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7월 14일부터 열린 근우회 전국임시대회에 경성지회 대의원으로 참석했으며, 7월 16일 열린 중앙위원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무렵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했으며 전국임시대회 개최 이전 행동 강령을 논의하는 3인 위원회에서 전쟁에 반대하는 슬로건을 채택할 것을 주장하였다. 1929년 1월 열린 중앙상무위원회에서는 3회 이상 결석을 근거로 위원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1928년 10월 러시아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였다. 1929년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던 임민호(林民鎬)와 결혼했으며, 12월 19일 열린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조선·일본반 합동회 제6일차에 근우회 운동에 대한 평가와 여성운동 필요성 등에 대해 연설하였다. 1932년 5월, 대학을 졸업한 후 임민호와 함께 모스크바 교외에 있는 우제르나 휴양소에서 국제 노동운동에 대한 문제와 지하 공작에 관계되는 기술·지식 등을 익혔다. 1932년 9월 국제직업동맹 중앙본부로부터 함흥·흥남 등을 중심으로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라는 비밀 임무를 받고, 1933년 2월 모스크바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국내로 잠입하였다. 같은 해 5월부터 태평양노동조합(太平洋勞動組合) 활동과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 함경남도 함주군(咸州郡) 기천면(岐川面) 오노리(五老里)의 제방공사장에서 양봉순(梁鳳順)·김인동(金仁東) 등과 회합해 노동조합 조직에 착수할 것을 약속하는가 하면, 1934년 2월에는 원산에서 활동하다가 신변에 위협을 느껴 함흥·흥남으로 피신한 남중군(南仲軍)을 만나 「전쟁과 조선프롤레타리아」, 「조선의 기아민과 그 구제책」과 「조선공청에 보내는 킴의 공개장(公開狀)」 등의 자료를 전달하였다. 8월 하순에는 조직 지도선을 남중군에게 인계하였다. 국내에서 활동을 전개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 블라디보스토크 방면으로 왕래하다가 1935년 1월 흥남경찰서에 붙잡혔다. 1936년 3월 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을 받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39년 풀려난 이후 태평양노동조합 활동으로 붙잡혀 1940년 석방된 임민호와 함께 중국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과 둔화현(敦化縣) 등지에서 생활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9월 20일 둔화영화관에서 개최된 둔화현 민중대표회의에서 민주해방동맹(民主解放同盟) 산하 여성해방동맹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0월 지린시(吉林市)로 들어가 지린성 부녀동맹과 지린시 부녀동맹에서 활동하였다. 그 후 1947년 1월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49년 12월 중국공산당 옌변지방공작위원회 부녀공작위원회 부서기로 임명되었고, 1952년 9월부터 옌볜조선족자치주 부련회 주임 등 부녀사업을 맡았다. 1955년 5월에는 옌볜사범학교의 제1부 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60년 이후 옌볜조선족자치주 민정처 부처장, 시찰실 시찰원 등을 역임하였다.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반역자’, ‘소련 특무’라며 박해를 받다가 1972년 11월 23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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